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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점점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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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석순 Oct 20. 2024

점점 (8)

   그래도 우석 씨에게만큼은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무릎보호대만 해도 좀 나은 작업에 대해서. 정말 B조 모두 낫으로 하는 제초 작업에 동의했는지. 혹시 또 A조도 동의한 일이라고 하진 않았는지.      


   교대할 때 기회를 봐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초소에 들어섰다. 주민이 있는지 두리번거린 다음 의자에 앉아 몸을 늘어뜨렸다. 잡초를 낫으로 하나하나 베어 내려면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었다. 벌써 손목이 욱신거렸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릿한 것 같았다. 슬리퍼로 갈아 신고 다리를 쭉 뻗으니 바닥에 뭔가 걸렸다. 허리를 숙여 보니 구석에 무릎보호대가 처박혀 있었다. 생활용품점에서 싼값에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내 것과 똑같은 무릎보호대. 그제야 관리소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석 씨도 그러시더니 둘이 짰습니까?      


   순간 우석 씨에게 묻고 싶은 말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어쩌면 근처 생활용품점에서 나와 똑같은 무릎보호대를 샀을 우석 씨에게. 관리소장이 눈을 부라리면 종종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는지. 미화원이 열심히 지우다가 결국 포기해 버린 기름기 얼룩을 모르는 척해 본 적이 있는지. 새벽에 쪽잠을 자려고 하면 꼭 택배를 찾는 주민이 있어서 신경이 곤두서진 않는지. 그래도 그 시간을 휴게시간으로 치는 게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지. 그럴 땐 누군가와 이야기하며 훌훌 털어 내고 싶진 않은지. 그 누군가가 나일 때도 있었는지.     

   우석 씨가 호응해 준다면 무릎보호대를 쓸 수 없는 난처함도 낫으로 제초 작업을 하는 피로도 얼마간 견딜 만할 듯했다. 우석 씨도 어쩔 수 없이 동의했을 테니 빳빳했던 마음마저 물러질 것 같았다. 나 혼자에게만 벌어진 특별한 일이 아니란 생각 때문에. 남들 다 버티고 사는 거 나라고 못 할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어쩌면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서로 더 불리한 쪽으로 조금씩 밀어냈던 것일지도 몰랐다. 점점 기울어지다가 이내 휘청거리고 내동댕이쳐진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러자 초소 문 옆에도 점을 찍어 둬야 할 듯했다.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안전하다는 점을.     

          

   “마스크 벗고 대화한 적은 없다는 거죠?”     


   이쯤에서 한숨을 쉰 끝에 관리소장의 목소리는 얼마간 누그러졌다. 전화를 받았을 땐 다짜고짜 어디냐고 험악하게 다그쳤다. 근처라고 한 뒤 서둘러 가겠다고 덧붙이자 일단 멈추라고 소리쳤다. 단지 내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고.      


   유행기에 접어들었을 땐 주민 중에서도 확진자가 쏟아졌다. 그때마다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이 잰걸음으로 단지 안을 돌아다녔다. 밖으로 나온 주민들은 소란스럽게 모여들다가도 이내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마스크를 고쳐 썼다. 아이들은 제자리에서 뛰어오르며 함성을 지르다가 끝내 울먹였다. 금세 몇 호 주민이 확진되었는지 밝혀졌다. 같은 라인에 사는 주민들은 관리소에 몰려와 원인 분석과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관리소장이 거리 두기를 하라고 소리치면 물러났다가도 어느새 다시 다가섰다. 누구도 정확한 원인은 알지 못했고 관리소장은 그저 방역을 철저히 하겠다고만 반복했다. 마땅한 지침조차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보다 곤욕스러운 건 따로 있었다. 늦은 밤 퇴근한 주민들은 오늘 어느 집에서 확진자가 나왔냐고 집요하게 캐물었다. 누군지 알아야 조심할 거 아니냐며 몰아치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쳤을 수도 있지 않냐고 했다. 나는 자세와 표정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주민들의 개인정보를 보호해야 한다는 규정을 들먹거릴 수밖에 없었다. 한창 실랑이를 벌이던 주민 중 한 명이 어딘지 모르게 애원하는 말투로 내뱉었다.     

   “우리 애는 면역력이 약하단 말이에요. 이러다 사방팔방 퍼지면 어쩔 거예요? 몇 동인지만이라도 공지해야죠. 주민이 물으면 대답하는 게 경비 의무 아닌가요?”      


   끝내 입을 열지 않았지만 소문은 자연스레 경비가 확진자를 떠벌리고 다니는 것으로 퍼졌다. 종일 아파트에 있다 보니 말 전하기 좋은 사람은 경비뿐이라며.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주민들 뒷얘기를 했었다고. 그때도 관리소장은 오해받는 것까지 우리의 역할이라고 했다. 오해와 개인정보 보호와 대답할 의무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던 날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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