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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점점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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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석순 Oct 20. 2024

점점 (10)

   “시시해.”     


   예초기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기대했을 아이는 단단히 삐친 듯 부루퉁해 보였다. 차츰 무뎌져 가는 낫질에 아이의 목소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아이가 낫으로 하는 제초 작업은 시시하다는 민원을 넣어 줬으면 싶었다. 그땐 관리소장도 어쩔 수 없이 기계를 쓰라고 할지 몰랐다. 아이도 주민이고 주민이 그렇다면 그런 거니까.      


   그만 따라다니라고, 이제 집에 들어가라고 해도 아이는 꼼짝하지 않고 버텼다.    

 

   “집 밖에 있을 거면 차라리 경비 아저씨 근처에 있으래요.”     


   예전에는 CCTV가 있는 쪽으로만 다니라고 했는데 도둑이 든 다음부터 바뀌었다고 덧붙였다. 그게 안전하다고. CCTV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고.     


   낫을 네댓 번 휘두를 때마다 사이사이 아이를 살폈다. 이번에도 보호자는 없었다. 시선이 느슨해지는 순간 아이에게 사고라도 생기면 그 책임은 오롯이 내게 돌아올 것이었다. 아이는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내 쪽을 넘겨다봤다. 눈이 마주치면 숨을 고르고 땀을 닦았다. 요즘 들어 한낮에는 매서운 폭염이 뺨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해가 기울자 주춤하는가 싶었지만 종일 쌓인 열기는 사그라들 줄 몰랐다. 그래도 맹렬하게 달려드는 땡볕 아래서 작업하는 것보단 나았다. 이 시간에 진행할 수 있는 건 낫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새벽이나 아침 일찍 예초기를 쓰면 주민들의 수면을 방해했다. 그렇다고 해가 진 후 열기가 완전히 잦아들었을 때 기계 소리가 나면 주민들의 휴식을 망쳤다. 경비에게 주민들의 수면과 휴식 시간을 지키는 일은 중요했다. 하지만 정오쯤에도 이 시간에 꼭 잠을 자야 한다는 주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작년에는 민원을 감수하고 주민이 가장 없을 시간에 예초기를 썼지만 지금 관리소장의 입장은 달랐다.     


   “한낮에 기계로 하나 해 뜨기 전이나 늦은 오후쯤 낫으로 하나 공평하게 힘든 겁니다. 그러니 잔말 말고 낫이나 하나씩 받으시죠.”      


   관리소장은 그런 말로 남은 경비들을 구슬렸다. 그게 낫질과 예초기 사이에 시간대가 맞물리면서 서로 다른 민원이 예상되는 동안 관리소장이 잡은 균형인 듯했다.  

   

   검사 결과가 음성으로 뜬 경비들은 홀숫날 짝숫날 구분 없이 서둘러 복귀해 밀린 작업을 해치웠다. 관리소장은 당분간만 고생해 달라고 했다. 다른 작업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계획보다 더 적어진 인원으로, 게다가 낫으로 해야 하는 제초 작업이 골치였다. 잡초는 하루가 다르게 쭉쭉 뻗어 나갔고 작업을 마쳐도 다음날이면 작업이 들어가지 않은 구역과 다를 바 없는 날도 있었다. 그사이 경비들 관계는 또 어그러졌다. 하루빨리 인력 충원을 요청해야 한다는 쪽과 그래도 양성 통보를 받은 경비를 기다려야 한다는 쪽이 팽팽하게 맞섰다. 101동 경비가 언제까지 쉬는 날까지 줄여 가며 두 사람 몫을 해낼 수 있겠냐고 하면 109동 경비가 치료를 마치면 곧 돌아올 거라고 받아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 모집 공고문이 새로 떴다. 작업이 더뎌지고 곳곳에서 크고 작은 실수가 속출하는 바람에 평소보다 민원이 급증했을 때였다. 마감 날짜만 바꾼 채 근무환경과 조건은 동일했지만 제출해야 할 필수서류가 하나 늘었다. 3일 이내에 받은 음성확인서. 다음날 조회 시간에 기다리자는 쪽에 있던 109동 경비가 따져 물었다. 다들 며칠이면 퇴원해서 복귀할 거라는 얘길 들었다고. 관리소장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저도 기다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방역 수칙을 준수하지 않은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이게 밝혀지면 주민들은 경비가 바이러스를 옮기고 다녔다고 믿을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마스크 좀 쓰라고 했잖습니까?”     


   경비들은 시선을 피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미 소장의 말처럼 생각하는 주민들이 많은 눈치였지만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따질 순 없어선지 잠자코 있었다. 분명한 건 주민이 경비에게 옮긴 것과 반대의 경우는 사뭇 다른 문제라는 것이었다. 드세게 맞설 듯했던 109동 경비는 무춤하면서도 완전히 물러나지 않았다. 나는 며칠이면 퇴원한다던 경비가 우석 씨인지 묻고 싶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석 씨만큼은 정말이지 한 번도 마스크를 벗은 적이 없는데. 밖에서 길 가다 마주쳐도 모를 정도로.     


   그때 관리소장은 난폭한 목소리를 냈다.   

  

   “어쨌든 누군가는 일해야 합니다. 계속 자리를 비워 둘 순 없단 겁니다. 조건에 맞는 사람이 있다면 내일 당장이라도 투입될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관리소장은 문을 열면서 말을 끊었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어쩐지 차분하게 들렸다.     


   “항상 경계를 늦춰선 안 됩니다.”      


   한쪽에선 이왕 뽑을 거 제초 작업 마무리 전에 뽑아 달라고 외쳐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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