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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점점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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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석순 Oct 20. 2024

점점 (11)

   낫으로 하면 소음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마냥 느긋해질 순 없었다. 어두워지면 잡초와 화초 구분이 어려워 애써 가꿔 놓은 화단을 망치기 일쑤였다. 가로등을 LED로 바꾸지 않아서 그런지 단지 안은 해가 지면 유난히 진득한 어둠이 우글거려 으슥해졌다. 그나마도 이제는 하나 건너 하나씩은 껐다. 지구의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단지 내 전기세 절감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였다.      


   아무래도 아이를 데려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허리를 폈다. 어느 틈에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그늘로 뒤덮여 있는 듯했다. 어디 숨어있는 건가 싶어 부르려고 했지만 이름조차 몰랐다. 몇 호 아이인지조차도.     

   햇빛이 물러나자마자 엷은 어둠이 서성거리더니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순찰을 하며 점을 찍어야 할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단지 내에 확진자가 계속 나와도 점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찍어야 했다. 감염된 우석 씨의 몫까지 맡아 더욱 성실하게. 관리소장 말마따나 바이러스가 퍼졌다고 도둑이 안 드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점을 찍는 건 비대면이니까.      


   초소에 들러 대충 땀만 닦은 다음 부리나케 사인펜을 들고 나섰다. 불현듯 사인펜에서 우석 씨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껏 우리는 같은 사인펜으로 점을 찍고 있었다. 우석 씨도 한 번쯤 온기를 느끼다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을까. 순간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긋고 지나갔다. 벌써 저녁이면 계절이 달라질 낌새가 느껴졌다.     


   점을 찍기도 전에 손바닥에 땀이 고여 들어 축축해졌다. 확진자가 나온 다음부터 마스크를 썼더라도 주민들과 마주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일은 원칙적으로 금지였고 다시 라텍스 장갑을 끼고 돌아다녀야 했다. 택배를 건네줄 때도 장갑은 필수였다. 미화원이 불만을 제기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안 들어도 빤했다. 도둑이 든 것도, 코로나19에 감염된 것도 우리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우리도 뭔가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게 중요했다.      


   안으로 들어섰는데도 일 층 현관 센서 등이 켜지지 않았다. 손으로 허공을 휘저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전기기사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복도 등마저 깜빡거리더니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정상 작동하는 걸 보니 정전은 아닌 듯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일단 101호 안전 점검표부터 확인했다. 오늘 날짜엔 벌써 점이 찍혀 있었다. 심통 난 아이가 또 장난친 걸지도 몰랐다. 악당들로부터 아파트라도 지키려는 마음으로.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니까 그새 기록표에 손이 닿을 만큼 자랐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벌써 나와 교대할 B조의 새로운 경비가 뽑힌 것일 수도 있었다. 이 도시에 일할 사람은 널렸으니까. 그중 아직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이들도 많을 것이었다. 그러니 구하고자 하면 못 구할 것도 없었다.      


   아니면 우석 씨일까.     


   원래대로라면 오늘은 우석 씨가 근무하는 날이었다. 새로 경비를 뽑는다는 소식에 서둘러 돌아온 것일 수도 있었다. 우석 씨의 건강이 잘 회복되었을지 궁금했다. 중증까지 간 건 아니었는지. 우석 씨가 맞다면 여전히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관리소장에게도 벌점을 매기고 싶었던 적이 언젠지. 대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한 거냐고 따지면서. 그때 불이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옆 거울 속에 얼굴이 드러났다. 거울 앞으로 좀 더 다가갔다. 지난주에 미화원 중에서도 확진자가 나온 탓인지 거울에는 얼룩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렇다고 얼굴 한쪽 구석에 찍힌 점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불안을 얼마나 잠재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점이.      

   아이가 숨어 있는 걸까. 어쩌면 놀이처럼. 그사이 엘리베이터는 꼭대기 층에 머물러 있었다. 순간 멀리 누군가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우석 씨라면 이번에야말로 꼭 물어봐야겠다. 혹시 아이일 수도 있을까. 그때 불쑥 피해 주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현장에 또 나타난다던데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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