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요즘 나의 주변에는 왜 이런 사람들이 가득해졌는지 알 수가 없다. 배려는 받고 싶고, 자신의 약점은 알려지기 싫고, 대신 한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그런 사람. 아니, 인간.
사람들은 서로 약속하지 않아도 공감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벽을 세우며 스스로를 가두고 자신의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많은 것을 감춘다. '내 실수는 그냥 넘어가 주겠지.' 하면서 남의 허점은 꿰뚫고 싶어 하고 약점을 잡고 싶어 한다. 상대방이 갖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많이 갖고 싶어 한다.
더 씁쓸한 것은 그러한 사회생활 속에서 누군가는 늘 좋은 사람이라는 타이틀 아래 희생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희생양이 내가 아니길 바랐지만 내가 되었다. 나는 좋은 사람. 일 잘하는 사람. 누군가가 남긴 명언이 있다. 사람이 좋으면 호구로 안다고, 잘해주면 권리인 줄 안다고. 침묵하며 배려하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한 사람은 힘든 일을 맡게 되고, 모든 것에 양보하는 것이 기본값이고, 양보하고 감정을 누르며 주변의 분위기 쇄신을 위하여 노력한다. 참는 사람이 된다. 그게 당연시돼 버린다.
'당연하지'라는 말, 익숙한 이 말속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누군가가 나를 챙겨줬을 때 고맙다는 감사표시 대신 '그 정도는 해줘야지'라고 받아들인다. 배려도, 이해도, 양보도 마치 받아야 할 마땅한 권리인 양 포장한다. 그러기에 참 적절한 표현이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무언가를 요구받게 되면 그 '당연하지'라는 말은 무게가 한층 더해진다. '왜 나만?' 받을 땐 당연하고, 줄 땐 억울한 것. 그것이 '당연하지'라는 말의 모순인 것 같다.
우리는 타인의 이런 태도에 대해 익히 듣고, 접하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입장이 된다면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나도 배려만 받고 싶고 약점은 감추고 누군가의 이해를 당연히 여기고 싶다. 내로남불은 거창한 이중잣대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소한 이기심과 조용한 위선 속에 피어나는 일상이다.
받은 만큼 돌려주고, 대화하는 만큼 이해하고, 누군가의 희생 위에 자신의 편안함을 올려두지 않기를 바란다.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내가 내로남불의 선두주자였는지 생각해 볼 법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