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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Apr 05. 2020

나이보다 어려 보이시네요

젊어지는 비결은 운동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내 나이에 대해 물어보면 주저하게 됐다. 정확히는 서른이 넘어가고부터였다. 사회 통념 상 여자 나이 서른을 지나면 꽤 나이 든 어른 축에 속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부수적인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결혼은 언제 할 거야? 직장은 어디? 몇 년 차세요? 관심을 빙자하여 이것저것 많이도 궁금해했다. 대신 짝을 찾아줄 것도 아니면서, 회사 간판 떼면 여기가 진짜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사회적 소임을 다 하고 있냐는 듯 묻고 따지니 도통 말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아마 그건 나를 그냥 내 자체로 봐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작년 말 인사 고과와 일월 초 부서 이동 통보를 받으면서 연초를 다소 우울하게 보냈다. 동기간 아빠의 환갑 여행까지 겹쳐지면서 역할 갈등이 심해졌다고 해야 할까. 회사원으로서의 나, 딸로서의 나,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회사가 인수 합병되면서 새로운 부서가 신설되고 이미 있던 부서가 합쳐지고 쪼개지기 시작한건 오래된 일이었다. 시스템의 큰 변화 앞에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전무했다.


"이런 부서가 생겼는데 네 업무랑 맞아서 어쩌겠니. 이동해야지. 나랑 일한지 몇년 됐지? 수고했고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을거야."


짧은 면담을 끝으로 이 바뀌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이의 제기를 해봤지만 방음벽에 대고 외치는 거나 다름없었던 고과, 자의라면 모르겠는데 말 몇마디에 차출되듯 보내졌던 팀 이동, 말 잘 듣는 착한 딸이 되고 싶지만 실은 그렇게 착하지 않은 나 사이에서 일어나던 내적 갈등. 한 해의 시작이 이상하게 꼬여있었다.  


서른 한살. 이제 더는 어리다고 할 수 없는데 여전히 모든 것들이 버겁고 불안정하기만했다. 일에 있어서 비전마저 보이지 않는다면 주체 없이 흔들려 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커리어를 이어가야 하니 조금만 더 참고 다녀보자 체념할때쯤 걱정이 하나 더 생겨버렸다. 크로스핏이었다. 새로 바뀐 팀에서 점심 시간 운동을 용인해줄까. 안 된다고 푸시가 들어오면? 점심 회식을 강요하면? 초조한 와중에 점심시간이 왔고 습관처럼 박스로 향했다. 운동 시작 전부터 자꾸 시계를 쳐다보며  안절부절했다. 코치님이 뭐가 문제냐고 물었다.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하자 앞으로 여유 있게 갈 수 있게 운동을 좀 더 빨리 끝내주겠다고 했는데, 같이 운동하는 오빠가 때마침 돌직구를 날리는 것이었다.


"뭐가 문제야, 그냥 그만둬."


이제 막 운동을 마친 또 다른 오빠가 셔틀콕 맞추듯 대화를 이어갔다.


"뭐야 그만둔다고? 그만 두면 이제 11시 반에 나오겠네?"


당사자인 나는 나름대로 심각한데 오빠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날 보고 있었다.


"이러다 박스에서 사는 거 아니야? 작가하면 되지."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버렸다. 줄곧 걱정했던 게 우습게 느껴질 만큼 회사 일은 이곳에서 별 거 아닌 이슈처럼 여겨졌다. 월급 만큼 좋은게 없다며 열심히 다니라는 부모님의 반응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 후로도 박스에서는 비슷한 일이 일어났는데 인사 발령이 나고 팀 이동이 될 때까지는 꼬박 보름의 기간이 있었다. 운동이 끝날 때마다 어김 없이 허둥지둥 박스를 나오는데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었다.

 

"뭐야~ 아직 안 그만뒀어?"


"돈 벌어야죠. 저 거지되면 어떡해요."


"살 빠지고 좋겠네. 다이어트되고."


그만 말문이 막혀버려서 피식 웃어버렸다. 사실 내심 좋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나에게 너 그거 그만두고 뭐해 먹고 살래라고 말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다음 플랜이 뭐야? 이런 거 따위 묻지 않으니까.

생각하건대 운동하는 사람들은 내 사회적 위치가 어떻든 내 나이가 어떻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내가 이 운동을 많이 좋아한다는 것, 이 운동을 열심히 한다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니 운동할 수 있는 비용과 여기에 시간을 투자할 만한 여유만 있으면 됐다.


그런데 나도 안다. 정말로 죽을 만큼 큰일이 아니라면 아무런 대책 없이 바로 직장을 그만두진 않을 사람이 나라는 걸. 나가더라도 내 발로 멋지게 나가려고 아등바등 열심히 일하는 거였다. 쇼잉하는 것도 신물 나고 억울하고 화나일도 많았지만 수입원이 있어야 하니 힘들어도 버텨내는 거였다.  그러니 힘들 때 힘내라는 말보다 더 의미 있는 건 그냥 믿어주는 거다. 뭘 해도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인생 대신 살아줄 거 아니니까 함부로 옳다 그르다 평가하지 않는 마음.


"여자가 다니기 편한 회사인데 그냥 잠자코 다니지, 대충 일하고 시집가면 되지 않아."


자꾸만 이런 잣대를 들이미는 사람들 사이에 껴있으면 뜨거운 열탕 속에 들어가 있는 것만큼이나 숨 쉬기 어려웠다. 나이나 성별을 갖고 훈계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앞에 거울을 들이밀고 싶었다. 제발 본인부터 돌아보시라고. 다행히 운동에서만큼은 열날 때마다 정신 차리라고 냉수를 끼얹어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덕분에 순간이나마 몸과 마음을 보호해줄 백혈구 수치가 올라가는 것도 같고, 그리하여 스스로 좀 더 단단해지는 것도 같고.




매일 같이 가는 크로스핏에서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같이 운동하는 오빠가 내년이면 마흔이라는 소리를 듣고서 깜짝 놀라기도 했고, 언니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운동을 꽤 오래 했지만 우리는 서로의 나이나 직업 얘기를 묻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어쩌면 나도 그분들에게는 어느 회사 몇 살 누구로 기억되는 게 아니라 이 시간대 운동 나오는 생각보다 힘센 애, 크로스핏터인데도 이상하게 저녁마다 달리기 가는 애로 비칠 수도 있었다. 선입견이 없어서 좋은 게 허물없이 보다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하루에 고작 한 시간, 많아야 두세 시간 보는데도 오래 사귄 친구만큼이나 살뜰해질 때면 내가 이 커뮤니티 안에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하여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시간을 두며 천천히 오래오래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어쩌면 나는 나를 그 자체로 봐달라는 말도 안 되는 욕심을 이미 채웠는지도 모르겠다. 생물학적 나이보다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땀을 한 바가지 흘린 채 자연 그대로 잘 보일 필요도 없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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