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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remy Cho Aug 19. 2017

노트북 열람실 B107번, 그 간절함

일본에 살면서 놀랐던 것 중에 하나는 그간의 통념과는 다르게 적어도 학교에서는 한국이 일본보다도 더 치열한 경쟁사회라는 점이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0교시부터 시작해서 10교시를 마친 후 저녁 먹고 야자까지 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는데, 내 이야기를 들은 일본 친구들은 그 사실에 매우 놀라워했다. 일본은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런 차이는 구글 내에서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최근에 구글 재팬의 신입사원 공채 면접관으로서 굉장히 많은 이력서를 보고 면접을 진행하였는데, 일본 친구들의 이력서는 한국 친구들의 이력서와는 사뭇 달랐다. 보통 1차의 서류전형을 통과한 이력서를 보면 한국은 정말 대단한 이력들을 가진 지원자가 많았던 반면, 일본 친구들은 다양한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한국식으로 이른바 '고스펙'으로 부르기에는 좀 애매했다.


바로 그 대한민국 경쟁사회의 한가운데에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고픈 내가 있었다. 

이런 경쟁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원하는 삶에 가까워지려면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경쟁의 판을 바꿀 만큼의 평범함을 뛰어넘는 경험을 하거나, 아니면 안타깝지만 묵직하게 노력해서 그 경쟁의 정점에 서거나. 첫 번째 방법의 좋은 사례로 내가 주목했던 것은 '나는 세계일주로 경제를 배웠다'의 저자 '코너 우드먼'의 이야기였다. 경제적 이론으로 무장한 억대 연봉의 애널리스트가 실물경제를 배우기 위해 6개월 동안 세계여행을 하면서 낙타, 와인, 목재 등 온갖 물건을 사고팔며 세계 경제를 직접 체험하며 배웠다는 경험담이었다. 그러는 동안 상상도 못했던 난관을 거치며 결국에는 5000만 원을 1억으로 불렸다는 내용이었는데, 나는 이 정도는 되어야 '판을 바꾸는'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런 비범한 이야기는 나와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그러기엔 나는 영어를 포함해서 너무 할 줄 아는 게 없었고, 스물다섯이 되도록 여권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온실 속의 화초였다. 한 마디로 정도(正道)를 벗어날 용기가 없었다. 이미 한 번의 호된 실패가 있었기에 또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코너의 이야기는 '80일간의 거래일주'라는 TV프로그램도 제작되었다


그러면 남은 방법은 다른 한 가지 - 그 치열한 경쟁을 묵묵히 이겨내는 것만이 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였다. 나는 그냥 정성을 다해서 딱 1년만이라도 죽도록 해보기로 했다. 나중에 실패의 순간이 또 오더라도 '그때 좀 더 할 걸'이라는 말보다는 '내 한 몸 진짜 불살라봤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물론 실제로 그 1년 동안,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실패 또한 참 많았다. 몇 과목을 포기해야 해서 9학기를 다녀야 했고 공모전도 무수히 떨어졌으며, 계획했던 토플 공부는 하다가 접었고 경영학회에서는 선배들에게 호되게 피드백을 받기 일쑤였다. 이전에 언급한 것처럼(2화 참조) 안타깝지만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고 내가 똑똑해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너무나도 많은 양의 할 일과 나의 부족함에 마음이 무너져서 불 꺼진 도서관 복도에서 얼마나 많은 밤을 엉엉 울었는지 모른다. 창피한 일이지만 너무 분하고 또 분해서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저 시간이 빨리 흘러서 얼른 서른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나의 똑똑해질 수 없음에 기인한 무거운 책임감의 1년이었다. 


노트북 열람실 B107번


아마도 나는 이 자리를 영원히 기억할 것 같다. 지정좌석이 리셋되는 아침 6시 20분부터 새벽 1~2시까지 거의 예외 없이 지킨 자리. 애초에 워낙 가진 재주가 모자라서 그 자리에선 성공보다는 실패가, 웃음기보다는 찌푸림이 더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부푼 꿈에 가슴이 뛰던 자리였다. 계획한 대로 쉽게 되는 것은 없었지만 나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꿈꾸던 서른 살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무엇보다도 이 자리에서의 마음가짐과 경험은 지금까지도 이따금씩 발생하는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해왔다. 자신 없는 영어로 면접을 봐야 한다거나, 기말고사와 회사 면접 여러 개가 겹쳤다거나 혹은 낯선 타국에서 혼자 버텨 이겨내야 하는 등의 위기의 순간이 있기 마련인데, 이렇게 올라버린 '노력과 마음고생의 역치'가 그들을 극복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잘 담금질된 이런 간절함은 내가 이 역치만큼의 에너지를 쏟아부으면 어떤 위기의 순간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으로 돌아왔고, 후에 내가 가진 것 이상의 것들을 도전하는 데에 든든한 밑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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