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remy Cho Sep 02. 2017

세계의 경계를 허물다

지구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성층권의 끝자락에서 누군가가 우주선 밖으로 뛰어내려서 지구를 향해 자유낙하를 시작한다. 뛰어내리기 직전 툭 내뱉는 담담한 말이 인상적이다. "I am going home now". 몇 년 전 에너지 음료 업체인 RedBull에서 진행했던 Felix의 초음속 자유낙하 도전 장면(영상)인데, 동영상 홍수 시대에서도 유독 볼 때마다 전율을 느낀다. 우주의 경계에서 아득한 지구로 뛰어내리는 그 용기도, 두려움의 정점에서 담담하게 한 마디 툭 던질 수 있는 여유도 굉장히 멋지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처럼 전 세계인에게 영감을 줄 만한 도전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작은 나만의 세계 안에서는 나도 감히 '도전'이었노라 부르고 싶은 용기가 몇 번 있었는데, 그중 가장 독특한 것이 바로 'Alpha Kappa Psi'(알파카파싸이: 1904년 창립,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 등 수많은 정재계 인사를 배출하였다.)라는 단체 활동을 한 것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대략 사교 목적의 동아리와 경영학회를 섞은 것과 비슷한, Fraternity(이하 '프랫')라고 불리는 조직이었다. 언뜻 무슨 단체인지 와 닿지 않는 설명이지만 정말 놀라우리만치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동안 나의 세계는 무척이나 제한적이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서 외국인이랑은 말해본 적 없는 부족한 경험이 내 세계를 작게 경계 지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조용하고 내향적인 성격이 스스로 운신의 폭을 많이 좁혔었다. 나는 새로운 환경도, 새로운 사람들도 늘 낯설어했다. 그런 내게 미국식 프랫은 내가 쌓은 세계의 경계를 온전히 허물어내야 하는 작업이었다. 가입하는 것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는데, 평일 저녁 3일간 벌어지는 Information night, Social night, Professional night에 빠지지 않고 참여해서 헐리우드 영화의 파티 장면에서나 봤던 삼사오오 모여있는 사람들 대화에 이리저리 끼어들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눈도장을 찍고, 거기서 주어지는 기상천외한 미션을 예비 지원자들과 팀을 이뤄 수행해야 했다. 예를 들면, 옷걸이 같은 물건을 무작위로 쥐어주고는 팀원들과 이 물건을 효과적으로 팔 수 있는 1분짜리 광고를 만들어 보라는 식이었다. 그렇게 다 하고 나서야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이 면접과 지난 3일간 보여줬던 지원자들의 모습을 종합하여 예비회원을 선발했다. 


이런 과정 끝에 나는 13명의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유일한 방문학생이자, 영어가 능숙지 못한 유일한 예비회원으로 7주간의 길고도 긴 연수기간을 보냈다*. 그리고 진심으로 말하건대 내게는 이 7주가 내가 몸담았던 백마부대의 신병교육대보다 더 힘들었다. 빼곡히 적힌 계획표대로 우리는 매일 복무신조와 군가를 외우듯이 프랫의 신념과 가치, 역사 등 엄청난 양을 토시 하나 빠트리지 않고 달달 외워서 퀴즈를 풀었고, 매일 쉼 없이 쏟아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미션을 수행하느라 일주일에 2~3일은 같이 밤을 새워야만 했다. 자유의 나라 미국이었음에도 분위기는 무척 고압적이어서 그 기간 동안 정회원과는 조교와 훈련병 못지않은 상하관계로 공포에 떨었고, 군대에서부터 내가 치를 떨어 마지않던 한 명의 실수/실패를 동기 전체가 책임지는 잔인한 공동책임제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13명이었던 동기들은 10명으로 줄었다. 나는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방문학생 첫 학기부터 한국에서도 받아보지 않았던 학사경고를 미국에서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 모든 시간을 걸고, 정말 이를 악물고 영어를 외우고 또 외우고 이등병 때 보다도 더 빠른 눈치를 발휘해 꾸역꾸역 동기들을 따라 해 나갔다. 너무 영어 때문에 이리저리 치여서 외워야 할 퀴즈 내용, 내가 분명하게 전해야 할 말, 그리고 정회원들이 공지했던 중요한 내용들을 전부 녹음해서 잘 때 조차도 계속 틀어놓고 잤다. 자고 일어나면 밤새 저절로 외워져 있길 빌면서... 그렇게 동기들과 울고 웃으면서 연수를 수료하고 10개월 후 한국에 돌아오는 날의 공항에서까지 정말 많은 일들을 함께했다.

바다의 크기를 본 사람들은 천하의 강을 보아도 놀라지 않는다고 누군가 그랬던가. 


이렇게 넓어진 나의 세계는 더 이상 나의 미래를 작게 규정짓지 않았다. 영어 실력이 굉장히 많이 는 것은 당연했고, 특이한 경험이 늘어나면서 사람들과의 대화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게 생긴 자신감에 100년 넘게 운영되어 온 프랫의 체계적인 시스템에 대한 경험을 더해서 한국에서 내가 몸담았던 경영학회에 접목시켰다. 그렇게 조직이 한 번 더 도약을 하고, 좋은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고, 그러면서 여러 기업들과 실제 산업을 두고 산학연도 덩달아 진행하게 되면서 나의, 아니 우리의 세계가 점점 더 함께 커져갔다. 


내 개인적으로도 넓은 기회의 문이 열렸다. 새벽 도서관 바닥에 앉아 훌쩍거리던 때를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들이었다. 다음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방문학생을 하던 중간에 인생 첫 번째 인턴쉽 프로그램**을 미국의 유명 투자은행에서 하게 되었고, 동시에 프랫 친구 몇 명과 팀을 이뤄서 나간 Case Competition에서 우수한 학교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하였다. 그때의 발표 주제가 우연찮게 '구글의 중국 진출전략'이어서, 훗날 내가 구글에 입사하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세상은 내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세계의 경계만큼만 그에 상응하는 크기의 꿈을 주었다. 내가 그 경계를 허물기 위해 두 눈을 질끈 감고 용기를 내어 한 발을 더 내디뎠을 때, 그리고 그렇게 개척한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부단히 노력하였을 때, 내겐 딱 그만큼의 기회와 꿈이 더 생겼다. 그 한걸음 한걸음이 내가 그렸던 '좀 더 나은 서른'을 빚어냈음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렇게 조금씩 나는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Pledging이라고 불리는 정회원이 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혹독한 시험기간

**Morgan Stanley의 Financial Trainee Program



이전 06화 한국에서 날아온 특이한 방문학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