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어는 기세야 기세,
치고 나가야 해, 알겠어?

영어 때문에 악전고투하는 모든 이에게

by 뉴욕의 이방인

영어 스트레스

남의 나라에 가서 그 남의 나라 말을 써야 할 때면 당연히 스트레스받는다. 즐겁게 외국으로 여행을 가서도 현지 언어로 얘기했는데 현지인이 못 알아들으면 짜증이 난다. 하물며 이민 와서 남의 나라 말로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오죽하랴.


빌딩 주인의 기세

내 의뢰인 한 분이 빌딩을 사게 되었다. 뉴욕에서는 부동산을 매입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셀러와 바이어가 각자의 변호사들과 함께 모여서 클로징이라는 최종 절차를 갖는다. 은행에서 융자를 받는 경우는 은행에서 보통 모이고 은행을 대표하는 은행 변호사도 클로징에 참석한다. 은행에서 클로징이 끝나갈 무렵 은행 변호사가 자기의 변호사비 청구서를 내밀었다. 융자를 받는 경우 은행 변호사비는 융자를 받는 사람이 내기 때문이다. 변호사비는 5,000불. 내가 생각해도 은행 변호사가 많이 청구했다 싶었다. 하지만 백만 불 가까운 돈을 은행에서 빌려서 빌딩을 매입하는 의뢰인이 이 돈을 안내면 클로징이 끝나지 않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의뢰인은 나이가 드셔서 영어를 잘 못하신다. 체크를 쓸 줄도 몰라 나에게 체크에 받는 사람 이름과 액수를 적어 달라고 하고는 사인만 본인이 했다. 청구서를 본 의뢰인은 나에게 한국말로 은행 변호사에게 변호사비를 깎아 달라고 얘기하라고 했다. 창피했다. 큰 은행을 대리해서 클로징에 나온 점잖게 생긴 백인 변호사에게 한국 의뢰인을 대신해서 "당신 변호사비가 너무 많으니 깎아주세요"라고 말하기에는 자존심도 상했다. 의뢰인에게 은행에서 결정한 은행 변호사 비용을 깎기는 어렵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일단 깎아 달라고 얘기라도 해보라고 재촉했다. 내가 우물쭈물 하자 영어를 못하는 의뢰인은 별안간 "잇츠 투 익스팬시브"라고 은행 변호사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한국식 투박한 악센트 때문에 못 알아 들었다. 아니 의뢰인이 영어를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가 갑자기 영어로 얘기하니 의외였기도 했다. 은행 변호사도 못 알아 들었는지 아니면 못 알아듣는 척을 하는지 머뭇거리면서 나를 보았다. 손님은 단호하게 다시 말했다. "잇츠 투 익스팬시브" 다시 들으니 "It's too expensive"라고 말한 것을 알았다. 손님은 이렇게 말하면서 똑바로 은행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은행 변호사는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한참 아무 말 없다가 자신의 변호사비 청구서를 집어 들고는 5,000불에 쭉 긋고는 4,000불이라고 고쳐써다. 고쳐진 청구서를 의뢰인에게 주면서 "Are you happy, sir?"라고 반문했다. 단 한마디에 1,000불이 깎였다. 나는 의뢰인을 다시 봤다. 이 분이 이래서 많은 빌딩들을 가지고 계시는구나.


중국 법대생의 패기

2002년 가을 법대에서 수표법 강의를 들을 때 이야기다. 강의가 끝나갈 무렵 교수님은 여느 수업시간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에게 질문이 있냐고 물었다. 중국에서 유학온 여학생이 질문을 했다. 너무 중국 악센트가 심해서 질문 내용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교수도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질문을 다시 한번 해달라고 했다. 중국 학생이 다시 심한 악센트로 똑같은 질문을 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는 얼굴이 화끈하면서 "창피하게 왜 미국 학생들 앞에서 좋지 않은 발음으로 창피하게 질문을 할까?" "그냥 수업이 끝나고 교수에게 조용히 물어보면 될걸..."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교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미안한 듯 질문을 잘 모르겠다고 둘러댔다. 영어 발음이 안 좋아서 못 알아듣겠다고 다른 학생들 앞에서 말하면 학생이 무안해할까 봐 배려해서 둘러댄 것이다. 나는 이 학생이 알았다고 하고 나중에 따로 질문한다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중국 학생은 강의실 앞으로 성큼성큼 나가더니 칠판에 자기의 질문을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교수를 쳐다보았다. 왜 내 질문을 못 알아 들어서 앞에 나와 칠판에 적어야 하냐는 듯이. 교수는 칠판에 적힌 질문을 보더니 좋은 질문이라고 하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나는 이 중국 여학생이 패기에 놀랐다. 많은 미국 학생들 앞에서 자기가 궁금해하는 내용을 알기 위해서 칠판에 적은 이 학생은 어디선가 변호사로서도 분명히 성공했을 것이다.


실전은 기세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영화에서 기우는 과외수업 첫 시간에 "시험이라는 게 뭐야? 앞으로 치고 나가는 거야. 그 흐름을, 그 리듬을 놓치며 완전 꽝이야. 24번 정답? 관심 없어. 나는 오로지 다혜가 이 시험 전체를 어떻게 치고 나가는가, 어떻게 장악하는가 거기에만 관심 있다. 실전은 기세야 기세. 알겠어?"라며 학생에게 자신 있게 치고 나가라고 말한다.


인생은 기세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은 미국 사람들과 대화할 때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자꾸 자기의 발음이 이상하지 않을까, 표현이 이상하지 않을까 너무 신경이 쓰인다. 특히 협상과 같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에 상대방은 내가 주눅 들어 어색해하는 점을 파악하고 그 약점을 파고든다. 법대에서 마리화나의 합법화 이유를 수업시간에 토론할 때였다. 내가 발표자에게 반대하는 입장의 논점을 제시하자 발표자가 내 질문을 못 알아듣는 척 말을 자꾸 돌렸다. 나는 내 발음 때문에 내 질문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고 지레짐작해서 나의 쟁점을 더 몰아붙이지 못하고 서둘러 질문을 끝냈다. 수업이 끝나고 미국 학생 한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 나의 논점이 좋았다고 하면서 발표자가 모두 알아들었는데 답변하기 어려우니 못 알아듣는 척했다면서 왜 더 질문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협상을 하는 경우에 우리 측이 훨씬 불리해서 어떠한 제안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고 우리 측에서는 상대방이 제시하는 조건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우리 측 조건을 자신 있게 내놓는 경우 상대방이 그 제안을 수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영어도 협상도 우리의 인생도 기세를 가지고 헷쳐 나가야 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미국 사람들은 왜 더 행복하게 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