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독거 일지

저돌적 한량

by Jeremy Yeun

[독거 일지 - 어떤 퇴사자의 8개월]


기념일을 챙긴다는 것은 누구에게는 의미가 있을 것이고 누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일상을 단조롭지 않게 쉼표와 마침표를 찍어주는 기념일을 지내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그게 여자 친구와의 100일이든 입사 10년이 되는 날이든 말이다.

29570325_2024212147791398_424366547016562764_n.jpg



그러고 보니 15년 가까이 근무했던 증권사에서 지난 1월 퇴사를 한 후 벌써 8개월이 지났다. 무심코 보니 이미 반년이 훨씬 지나버렸다. 반년 기념일이 되면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고 할 텐데 말도 안 하고 반년이 되던 날은 그렇게 나도 모르게 지나갔다. 퇴사일은 1월 15일인가 싶은데 나는 1월 7일이 마지막 출근이었으니 지난 7월 5일이 반년이 되는 날이긴 했다. 그날 뭘 했나 봤더니 라이카를 팔고 영상용 카메라인 소니 A7s3를 샀다. 20mm 1.8 렌즈까지 샀으니 퇴사 후 가장 비싼 하루 지출이긴 했다. 그리고 작년 11월부터 이어오던 250명 규모의 투자 관련 단톡방을 공식적으로 닫았다. 지금은 한시적으로 10월 말까지 파이널이라는 이름으로 50여 명 스핀오프 이어가고 있다. 잔잔하면서도 바쁜 퇴사 후 일상에 꽤 큰 결정들이긴 했다. 그리고 사업을 하려고 2번째 팀 미팅도 있었던 날이었다. 그러나 3일 전 메모장을 보니 '증권사 퇴사 후 반년 근황'이라는 글을 그즈음 써놓긴 했었다. 인지는 했었나 보군. 물론 개인적인 기록이고 확정이 안된 것들도 많아서 공개는 안 했다.


fdgg.JPG 제주 대한민국 2021


'증권사 퇴사 후 반년 근황'


투자자문 : 작년부터 유료로 시황 등의 투자자문을 해주고 있음. 유료라고 해봤자 커피값 수준. 암튼 소문이 나면서 250명 선까지 늘어났었고 예전 PB시절의 고객의 400여 명에 육박. 사실 퇴사할 때 이들을 데리고 영업을 해도 될 정도였을 만큼 실제 투자를 하는 사람들이었음. 만약 지점 영업을 다시 한다면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종목 추천 등을 할 수도 있었겠지. 근데 더 이상은 회사 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컸었기에 상업적 용도(?)로 이용은 하지 않음. 매주 책 한 권을 읽고 서평을 나누고 독거 투자일지와 질문이 오가는 것이 대부분의 콘텐츠. 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잡는 법을 배우는. 암튼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오셔서 여기에 들어가는 에너지와 시간이 상당하긴 했음. 예상보다는 많은 자문료를 받았으나 하루 주식평가액 움직이는 것보다 작은 수준. 6월 말에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여러분들의 요청이 있어서 한 분기를 더 봉사하기로 했다. 기존에 있던 방은 없애고 새로 방을 만들면서 인원수를 사모펀드 수준(?)으로 줄였는데 방을 마무리할 때 회원분들의 감사 인사가 참 따뜻했다. 다들 성투하시길. 아름다운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새로운 방에 계신 분들에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물론 인원이 작아져도 시간과 노력은 동일하게 들어가는 간다. 맘이 약한 것도 문제.


5555.PNG


유튜브 채널 : 수년 전부터 권유를 받았지만 워낙 끼가 넘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인 데다가 금융인들이 다들 그렇듯 이런 쪽은 좀 낮춰서 보잖아. 노력에 비해 돈도 안 되는 거 촬영하고 편집하는 게 정말 막일이라는 것을 매우 매우 매우 잘 알기 때문에 20년 가까이 해온 사진에 비해 영상은 손도 안 대는 영역이었다. 근데 채널 두 개나 개설을 한 것은 원래 10 년 전쯤에 만든 계정이 두 개였고 여기는 업로드 없이 비어있던 곳이었다. 이것을 살리기로 했다. 하나는 드론과 전문 촬영 장비들로 만드는 프로급 채널이 될 거고 다른 하나는 여행 채널이 될 것 같다. 아무래도 20대나 30대들과는 다른 관점의 여행이 되긴 할 거다. 사실 2014년부터 여행을 박 터지게 다니기 시작했으니 그때 유튜브를 했으면 여행 튜버계의 시조새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때는 여행 쪽은 활성화가 덜되어 돈도 안되어 금방 접었겠지. 그 무렵에 고프로 히어로 4를 샀는데 전혀 여행용으로 쓸 생각은 못했고 화질이 안 좋아서 큰 손해를 주고 팔아버렸다. 단순히 익스트림용이라고만 생각했었지.

지금 잘 나간다는 여행 튜버들이 올리는 영상들을 보면 내가 여행지에서 겪었던 수많은 즐거움과 고생들과 별반 차이가 없긴 하다. 유튜브에 대한 편견과 영상 귀차니즘 덕분에 좋은 기회를 놓친 것 아닌가 싶기도. 아무튼 늘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유튜브가 크게 돈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수익구조도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다. 장비 투자금액 회수하는데만 몇 년은 걸릴 것 같으니 말이다.

그냥 어차피 할 여행인데 라이브러리처럼 재워둔다는 성격으로 할 것 같기도. 부담을 갖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적어도 1년은 꾸준히 올려야 하더라. 주식하고 비슷한 면도 있다. 물론 잘 매수해야 하듯 잘 만들어야 하는 것도 똑같다. 중간에 그만두면 손절하는 것과 비슷하다.

고생하는 20~30대 유튜버들과 달리 나는 여유는 있는 편이라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 같다. 여행을 하면서도 계속 시장과 투자에 전념할 것이고. 투자와 여행을 결부 짓는 것도 생각하고 있고... 일단 해봐 가면서 확실한 콘셉트를 잡지 않을까?


청담 아재 TV : 페북스타 제레미 연의 일상다반사와 관심사로 연습 삼아 올리고 있지만 기존 영상들은 내려오고 곧 세계여행용 유튜브 아카이브로 바뀔 예정이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yixad4xImTolpTV9EflyIw



Jeremy Studio : 드론 등 영화 촬영 장비를 이용한 고퀄리티 4K, 도시, 자연 영상(Walk, Drive, Fly)

https://www.youtube.com/channel/UCOQhI088p0LuXco1Htu9nwQ



결국 독거 투자일지 역시 유튜브로 개설을 했다. 브런치에 올린 글을 내레이션 하는 정도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점점 말에 힘이 들어가니 이것도 숙달의 영역이기는 하다. 투자는 영원히 할 테고 가장 에너지가 적게 드는 것이 이 채널이라 꽤 오래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독거 투자일지 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T4OjhTXaTJsfrE2uwzOig


여기까지였다.

jj.JPG 제주 대한민국 2021
Screenshot_20210907-231325_Gallery.jpg 여수 대한민국 2021


영어랑 운동 : 마음의 여유가 없다. 정말 골프를 좋아해서 다시 치고 싶었는데 골프라는 것이 필드 나가 인스타 용으로 칠 거 아니면 타수를 줄여야 하니 평소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하루에 몇 시간? 다시 시작하면 정말 집중하게 될 거라. 설렁설렁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대신 집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 근력 운동 많이 한다.

2년 안에 다시 뉴욕에 정착할 생각을 해서 영어는 매일 하고 있다. 퇴사 전부터 11년 동안 매일 전화영어는 하고 있었고 업무도 대부분 영어 관련이었고. 물론 영어는 늘 어렵다. 많이 까먹은 중국어도 아깝긴 하다.


요란한 연봉 1억 퇴사자의 ㅇㅇㅇㅇ 라든가 여의도 출신 ㅇㅇㅇ의 ㅇㅇㅇ 시작 같은 캐치프레이즈가 난무하는 세상이다. 나는 퇴사를 상품화하지는 않았다. 뭐 그렇게 자랑할 일도 아니고 김칫국부터 먹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내실을 다져서 앞으로 어떻게 살지 확실한 무언가를 정하고 나서 샴페인을 터뜨려도 된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그렇게 저렴해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 연봉 1억은 아무것도 아니니 말이다. 여의도에서 돈 던지면 십중팔구는 연봉 1억들이 맞는다. 그래 봤자 직장인들이다.


백수 과로사한다더니 정말 퇴사하고 바로 몇 주는 정말 바빴다. 그 뒤로는 흔치 않게 몸살도 있었고 사랑니 발치도 두 번이나 했는데 몇 주간 무척 힘들었다. 다리를 다시 접질려 깁스도 했고... 이상하게 회사 밖은 위험한지 올해 병원 치례를 좀 하긴 했다. 화이자 맞고는 며칠 괜찮아 맥주를 3일 연속 마셨더니 다리가 저리고 머리가 핑핑 돌고. 어찌 보면 나이가 돼서 리모델링을 하는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거스르다.jpg 제주 대한민국 2021

아침에 일어나 책을 두 시간 보고 영어공부를 한 후 전일 해외 주식시장을 팔로우 업하고 나면 오후 늦게 가 되어있다. 이것저것 관심분야 유튜브를 보면 밤이 되어있었다. (드론 영상 프리미어 등을 유튜브로 배웠으니) 생각보다 자주 국내여행을 가진 않았지만 국내 여행 계획을 짜기도 하고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었다. 제주에 오래 있었다. 드론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고 액션캠도 4개를 사서 테스트 영상을 찍었다. 마이크와 조명을 구매해 본격적으로 크리에이터로의 하드웨어적인 준비는 끝냈다.


일정이 있어 여의도에 갔었는데 점심시간에 그 노타이에 셔츠 그리고 정장을 보면 살짝 토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정장을 무척 좋아하던 사람인데 희한했다. 퇴사 후 정장과 넥타이들을 많이 팔았다. 이쁜 것들만 남겨놓았다. 그리고 안 입던 옷들이나 직장생활과 관련된 것들도 다 정리했다. 다시 직장생활을 한다면? 다시 사야 한다 ㅋㅋㅋ 물론 그럴 생각은 없다.


nn.JPG 제주 대한민국 2021


나의 퇴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 이나가키 에미코의 '퇴사하겠습니다. '였다. 홍대 어느 서점에서 친구 가족을 기다리다가 서서 읽은 책이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10년 넘던 시기였는데 이제 사고 싶은 것은 다 있고 직장생활은 지루하고 시간낭비 같다는 생각, 그리고 결혼이나 아이 없이 그냥 나 혼자 편하게 사는 것이 아주 익숙해지고 좋아지던 시점이었다. 합리화와 당위성까지 얹어준 책이었다. 어렴풋이 그렇게 더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말이다. 이미 점점 회사로부터 정을 떼어가고 있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 퇴직자들이 전 직장을 비난하지만 나는 사회초년생부터 올해 초까지 15년 가까이 사람 만들어준 회사에 감사하다는 생각은 늘 한다. 물론 여의도는 잘 가진 않지만 ㅎㅎㅎ



어차피 한국에서 오래 살 것도 아니고 미니멀리즘을 추구해왔고... 하지만 오래 살다 보니 점점 비대해져 가고. 책장에는 다 읽느라 1년은 족히 걸릴 책들이 꽂혀있다. 큰 옷장 4개에 들어갈 빽빽한 옷들까지. SNS에는 오늘도 수많은 명품 쇼핑 사진들이 올라오지만 그걸 끊으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그와 다르게 냉장고는 큰 것을 사서 먹고 싶을 때 꺼내먹는 건 좀 다른 점. 아무튼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을 때 하고 산다는 것에 만족도는 상당히 좋다.


Screenshot_20210907-231439_Gallery.jpg 여수 대한민국 2021


퇴사 후 처음에는 낮에도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다니 신기해서 주야장천 다녔다. 한낮에 삼청동 커피빈에도 가고 월미도도 떠나고... 한반도를 해안선 따라 한 바퀴 돌았는데 고성부터 부산까지, 그리고 강화도에서 여수까지 무사히 돌고 왔다. 근데 점점 집이 편하더라. 뭔가 찾아보거나 공부하거나 할 때 모니터 두 개를 제공하는 곳은 어떤 커피숍도 없고 집 밖에 없다. 물론 나가 있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는 생각을 한다.


2.JPG 제주 대한민국 2021


화이자를 접종한 지 열흘이 지났다. 2차는 10월 초이고 2주 텀을 두면 10월 22일이나 되어야 나갈 자격이 주어진다. 북반구는 추워져서 갈 데도 별로 없다. PCR 검사도 돈 들여해야 하고 가서도 마스크 쓰고 다녀야 할 나라도 많다. 이렇게까지 해서 나가야 하나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은데 서울 콕하는 것도 그렇고 제주도 37일이나 머물러 새로울 것도 없긴 하다. 일단은 나가는 것. 나가면 늘 헝그리 정신이 생겼었다. 내가 살아있구나 하는 것은 여행지를 가야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좋아하는 일도 업이 되면 일이 되어버린다고 하지만 나는 최대한 즐기면서 해보려고 한다. 누간가는 주식 사이드 잡으로 소일한다고도 하겠지만 그것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긴 하다.


강병남.JPG


20210605_190310.jpg 제주 대한민국 2021


keyword
작가의 이전글독거 투자 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