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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문

물들다

by 정재혁

하늘이 노랗게 물들었다. 털썩. 나는 정신을 잃었고, 그 후의 기억은 없다. 눈을 뜨자,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새하얀 천장. 나는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정신을 잃고 입원한 지 일주일이 넘었다고 한다. 부모님이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내가 여기 왜 누워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그래서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본다. 일주일 전, 그곳으로 혼자 시간여행을 떠난다.


나는 운동장 구석 어딘가에 서 있다. 그리고 한 무리의 아이들이 날 둘러싸고 있다. 아, 맞다. 나 왕따였지. 무리의 우두머리 격인 녀석이 내게 돈을 요구한다. 난 돈이 없다고 했다. 진짜 돈이 없었으니깐. 그러자 그 녀석이 나를 넘어뜨려 마구 때리기 시작한다. 옆에서 구경하던 다른 녀석들도 합세한다. 입고 있던 교복 셔츠가 피로 물든다. 집단 구타가 끝나고 아이들이 돌아갔다. 나도 이제 집에 가려고 책가방을 챙기고 일어나려는데, 다리에 힘이 풀린다. 하늘이 노래지고, 정신을 잃었다.


시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누군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한 아이와 나이 든 남녀 둘. 날 때린 녀석들의 대장과 그의 부모인가 보다. 부모는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자기 자식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이번에 잘못되면 퇴학이라고. 천성은 착한 앤 데, 나쁜 애들이랑 어울리다가 물이 잘못 들었단다. 노란 머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노란 머리에 나쁜 물을 들인 친구는 누굴까. 그리고 노란 머리에 나쁜 물을 들인 친구를 물들인 친구도 있을까. 물든 사람은 분명히 있는데, 물을 들인 사람의 정체는 묘연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노란 머리를 계속 쳐다봤더니, 눈앞이 노랗게 물든다. 얼굴 한번 보고 싶은데 도통 고개를 들지 않는다. 그런데 어깨를 들썩인다. 우는 듯하다. 부끄러워서? 아니면 분해서? 녀석의 눈물을 보고 있노라니, 악어의 눈물이 떠올랐다. 저 눈물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갔을까. 이 노란 머리 녀석의 눈앞을 캄캄하게 해줘야겠다고 다짐한다. 내 옷은 피로 물들고, 내 눈앞은 노랗게 물들었지만, 너의 앞날은 아주 검게 물들 것이다. 너를 물들인 사람은 못 찾겠지만, 앞으로 너에게 물들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을 외면한 채, 병상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니 눈앞이 하얗게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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