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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문

약속

by 정재혁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슬픈 일이 뭔가 하면, 내가 상대방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무게에 비해 상대방이 나를 생각하는 감정의 무게가 훨씬 가볍다는 것을 느꼈을 때다. '나는 너를 이 정도로 생각했는데, 너는 그렇지 않았구나'와 같은 말. 연인 사이에서나 할 수 있을 법한 말 같지만, 사실 모든 인간관계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내가 누군가를 각별하게 여기면, 그 누군가 역시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게 인지상정이다. 성인군자라면 또 모를까, 보통의 인간에게 일방향적인 사랑을 베풀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오늘 약속이 깨지면서 나는 이러한 종류의 슬픔을 느꼈다. 불과 하루 이틀 전에 했던 약속도 아니고, 몇 주 전에 했던 약속이 단 몇 분간의 카카오톡 대화로 깨지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면서 동시에 슬픈 일이었다. 사실, 어렸을 때를 돌이켜보면, 약속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약속을 정하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휴대폰이나 컴퓨터가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약속을 정하기 위해서라도 서로 만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한 약속은 아마도 쉽사리 어기기가 어려웠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날 약속이 쉽게 정해지고 쉽게 깨어지는 모습을 보면, 기술의 발전이 편리함은 가져다줬지만 이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앗아갔을지도 모르겠다.


내 슬픔이 단순히 기술 발전의 과정에서 벌어진 일종의 촌극에서 빚어진 것이라면 참 다행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약속을 지키려 했던 그 마음, 다시 말해 내가 그들을 생각했던 마음의 무게에 비해 그들이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훨씬 가벼워서였다면, 내게는 이 사소한 일이 마음의 큰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균형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고, 그런 관계를 추구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다만,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100이라면, 나는 그대에게 적어도 50 정도, 아니 30 정도는 바랄 수 있지 않나.


약속이 깨지는 일은 일상다반사지만, 그렇다고 약속이 깨지는 것이 정상적인 일은 결코 아니다. 약속은 지켜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지켜지지 않는 약속은 더 이상 약속이 아니다. 약속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약속이 지켜진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는 서로 간에 신뢰가 어느 정도 갖춰져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의 일을 통해 우리들은 과연 어떤 관계로 맺어져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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