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바람의 나라>에서 시작된 고구려 극초기 알아보기
소설, 드라마, 게임까지 나온 만화 <바람의 나라>를 처음 접하게 된 건 나무위키에서 우연히 '유리명왕'을 쳐봤을 때의 일이었다. 나무위키는 객관성이 부족한 오픈 위키이다보니 어디까지나 참고용으로 보는 편인데(특히 역사는 원문 보세요) 거기에 역링크가 있다. <바람의 나라>는 거기서 처음 알게 되었고, 나는 이거 때문에 만화카페라는 것을 처음 가보게 되었다. 3시간에 7,000원이라 더 이상 엄두를 못 내고 있지만.
<바람의 나라>는 김진 작가의 작품으로, 고구려 대무신왕 무휼이 주인공인 '로맨스물'이다. 근데 이거 꽤나 물건인 게 웬만한 역사물보다 더 고증인 편이며, 특히 인물 묘사가 그렇게 좋았다. 사실 대무신왕과 연 말고 주목했던 인물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무휼의 아버지인 유리왕이었다. 유리왕은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장남으로, 어릴 때 아버지 없이 컸지만 증표를 찾아 아버지를 만나 태자가 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해피엔딩 싶지만 이 사람이 바로 황조가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실연의 아픔이 있다는 것. 거기다 사실 주몽은 만난지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작가님은 여기에 주목해 유리는 아버지 없이 커왔으며 고생 끝에 겨우 아버지를 만났지만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버린 모습에서 유리왕은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다 풀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는 유리왕을 '아버지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아버지 없는 어린 생활의 영향으로 인해 결국 아들 둘을 죽여버린 왕'으로 묘사했고, 나는 거기서 신선함을 느꼈다.
거기서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그 이후로 주몽과 유리왕, 특히 유리왕에 주목해서 많이 찾아보게 되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드라마 <주몽>
동북공정 문제가 부각될 때 나온 드라마라서 그런지 시청률 대박으로 워낙 유명하지만 현실적으로 만드려다 오히려 고증 문제로 많이 까인 작품. 실제로 보면서 사료만 제대로 지키면서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해모수의 장남이 해부루인데 그게 무시된 점.
● 드라마 <근초고왕>
고증이 너무 답 없다고 들은데다 애초에 1화만 보려고 딱 1화만 봤다. 주몽과 소서노의 관계가 제일 현실적으로 그려진 게 인상이 깊었다.
● 이광수, 소설 <사랑의 동명왕>
제목처럼 주몽과 예씨부인(작중에서는 예랑)의 사랑이 상당히 강조된다. 유리를 가진 시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원전과 달리 둘은 아직 결혼을 못했으며 떠나는 날에 강 위 배에서 관계를 맺어(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으나 이후 서술보면 맞다) 유리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소가 예랑이 주몽과 관계를 해 주몽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자 분노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는데, 대소는 예랑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사실 대소의 짝사랑은 원전을 살펴보면 시기상 대상이 예씨 부인이 될 수 있는데, 드라마 <주몽>은 소서노로 되어있다. 그야말로 드라마의 고증 오류.
● 김동인, 소설 <서라벌>
보다보면 1947년 작품인 게 상당히 실감난다. 유리가 온조는 몰라도 비류와는 사이가 이렇게 좋을 순 없다. 비류는 유리만 아니었으면 태자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원전 내용만 봐도 주몽은 태자 책봉을 거의 20년이나 미뤘고 유리가 오니까 바로 책봉해주는 행태로 보아 비류를 태자로 책봉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 신용구, <콤플렉스로 역사읽기>
아버지를 미워하고 아버지에게 불효했다는 죄책감은 유리에게는 커다란 고통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무의식에서 자신을 벌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을지 모른다. 즉, 죽음으로써 아버지에게 지은 죄를 대속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중략)
그의 불안정하고 미숙한 성격과 맞물린 무의식적인 죽음의 욕구가 급기야 자식을 죽이는 파괴적인 욕구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읽고 나서 깨달은 건, 이거 1999년 책이었냐고(내가 1999년생). 어쨌든, 이 책에서의 유리는 <바람의 나라>에서의 유리와 비슷하다. 어릴 때 자신을 버린(주몽은 그런 마음이 아니다) 아버지를 원망했던 유리가 5개월 만에 아버지가 사망해버리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아버지에게 불효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바뀌어 불효한 자신을 벌하고 싶어졌고 결국 그것이 효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져 해명을 죽이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물론 이건 성격이 히스테리한 탓도 있다고 하는데 까놓고 말해서 그에게 성격장애가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마침 어릴 때가 원인이었으니.
● 소설 <나에겐 선녀가 있다!>
내가 아버질 절벽으로 몰아갔구나!
또 내가 아버질 죽음으로 내몰았구나!
그러니 이사회 날 아침, 건강했던 아버지가 쓰러지신 거겠지.
- 존 -
이 소설은 주몽의 가족들을 전생의 주요 인물로 다룬 환생물이고 구글 북에서 구매해서 봤는데 밤에 눈물을 흘리며 봤다. 여기서 유리와 온조는 이복형제, 비류와 온조는 이부형제로 그려진다. 즉 유리와 비류는 재혼가정에서 가족이 된 관계일 뿐. 핵심 인물은 바로 유리왕의 첫째 부인인 왕후 송씨인데 자세한 건 스포일러이니 생략. 특히 여기서도 유리가 아버지 없던 삶이 너무 외로워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환생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고 한다.
● 임동주, <우리나라 삼국지>
책을 사서 본 건 아니고 서치하다 우연히 뉴스에서 연재한 걸 보게 된 것이라 책과는 디테일이 다를 것이다. 나는 고구려 초기만 봤는데 인물들이 인상깊었다. 주몽은 원전과 달리 그렇게까지 냉정하지 않은 성격인지라 예씨에게 유리를 태자로 책봉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지만 소서노의 아들들이 신경쓰여 예씨와 유리가 오고도 책봉을 쉽사리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예씨는 그런 남편에게 자신은 유리 때문에 산 것이라며 태자를 빨리 결정하길 원하고 만약 유리를 태자로 책봉하지 않을거면 유리를 데리고 떠나겠다고 한다. 결국 태자 책봉 전 실력을 테스트했고 그렇게 유리가 태자가 된다. 그 이후 왕이 된 유리는 첫 아내 송씨를 정말 사랑했으나 송씨는 일찍 죽고 그 이후에 화희, 치희를 들이는데 특히 치희는 그렇게 사랑했던 첫 부인과 외모가 흡사해 사랑에 빠지는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고증을 어느 정도 지키면서도 맛깔나게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 최정주, 소설 <소서노>
비류백제 대륙설하고 유리의 성장 속도(4살 때 그 패드립 일화 겪었다고 한다)가 신경쓰이긴 한데 나머지는 나름 괜찮았다. 특히 여기서는 <나에겐 선녀가 있다!>처럼 비류와 온조가 이부형제라는 설을 채택했는데 마지막에 온조는 어머니를 좋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유는 바로 비류에 대한 편애.
● 박혁문, 소설 <정설 주몽>
사실 환단고기를 반영했다는 것부터 아웃인데 결국 난 주몽의 성격이 인상깊어서 사고 말았다. 막상 주몽이 어릴 때 유화 손에 못 크는 등 고증도 제대로 지킨 것 같진 않지만.
● 집안시 현지 설화
아니 세상에. 주몽과 예씨와의 관계가 나오는 설화가 있다는 것부터 놀라웠다. 역사서부터 둘은 20여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순애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설화에서 더 자세했다.
● <황조가> 관련 논문들
나는 논문을 전부 무료로 볼 수 있는데 그건 내가 대학원생이기 때문이다. 물론 논문은 써야하지만.
많은 논문에서 <황조가>는 유리왕 본인의 고독과 외로움이 핵심이라고 보며, 유리왕을 작자로 보지 않는 입장도 이 요소는 인정한다. 왜냐하면 유리왕은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으며, 아버지 없어서 버릇없다고 욕을 먹은 걸 계기로 아버지를 찾고 싶어졌다. 이후 수수께끼를 풀고 드디어 아버지를 만나 태자로 임명되지만 아버지는 만난지 5개월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거기다 자신의 등장으로 인해 소서노를 비롯한 많은 졸본 세력은 자신을 떠나버리는 바람에 기반을 많이 잃어버렸다. 그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비류국 국왕이었던 송양의 딸과 결혼했으나 2년도 안 되어서 사망하고 만다. 이에 유리왕은 졸본의 중심으로 보이는 골천 지역의 화희, 한족 출신 치희와 재혼했지만 그것마저 화희가 치희에게 모욕을 주면서 날라가고 만다. 보면 알겠지만 태어날 때부터 불운의 연속이었고 특히 아버지의 상황과 비교해서 신대가 무너지는 패러다임 속이었기 때문에 <황조가>가 유리왕이 쓴 시라고 해도 이상한 게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찾아보는 건 오로지 내 흥미에 불과하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논문 주제도 지역사이기 때문에 관련이 전혀 없다. 하지만 이렇게 살펴보면서 논문도 정말 재밌는 해석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서치하다가 느낀 점은 잘못된 정보도 정말 많다는 것이다. 책을 보면 해결될 것 같지만 유사역사학자가 쓴 책도 있어서 조심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