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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Oct 12. 2022

나는 낭만의 도시, 파리가 싫어요

런던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향하는 유로스타 기차에 올랐다. 런던에 계속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미 파리에서 쓸 뮤지엄 패스도 샀고, 기차와 에어비앤비, 그리고 몽생미셸 투어 예약까지 마쳤으니 별 수 있나, 그냥 떠나는 수밖에.



사실 내가 런던에 계속 머물고 싶어 했던 이유도, 낭만의 도시라 불리는 파리에 가기 싫어진 이유도, 무엇 하나 뚜렷한 게 없었다. 나는 그저 기차에 올라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런던의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씁쓸함도 잠시, 지나가는 풍경들과 미련 또는 기대와 같은 다양한 감정들은 연기처럼 피어올라 곧 사라졌다. 런던을 떠나오며 내가 바라본 나무와 건물들에는 분명 나의 고민과, 나의 계획과, 나의 추억이 묻어있을 테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3년이 지난 요즘도 나는 가끔 생각하곤 해.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네가 나에게 준 선물이 차고 넘쳤기에, 내가 너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프랑스 사람들은 자국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면 여행이 힘들 수 있다', '프랑스는 유럽 중에서도 인종차별이 심하기로 유명한 나라니 조심해라'와 같은, 누가 시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행자들 사이에서 흔히 떠돌아다니는 그런 말 말이다.


운이 좋게 영어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나는, 여행을 준비하며 현지에서의 생활을 걱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여태껏 방문했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그게 힘든 중국에서는 중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면 됐었기에, 크게 이질감을 느끼던 여행이 없었던 것이다.


여행에 대한 작은 걱정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 즈음 다행히 기차는 종착역에 도착했다. 나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들이 그토록 주의를 주던, 나에게 이질적인 첫 여행지,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알아듣지 못할 언어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비릿한 냄새가 나는 지하철은 도시를 처음 방문한 여행자에게 위압감을 주었다. 큰 캐리어와 가방을 둘러메고 가는 내 모습이 분명 여행자로 보였을 텐데도 내게 영어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도 영어로 적힌 안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좌절감이 석양과 함께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어쩐지 파리에 오기 싫다 했어.



파리에 도착한 첫날, 나는 이 답답한 도시에서의 일탈을 꿈꾸며 저녁 식사 동행을 구했다. 타지에서 여행자를 만나는 건, 현지인을 사귀는 것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즐거움을 담고 있기에, 그날 약속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마치 하늘을 나는 듯 가벼웠다.


우리는 퐁피두 센터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사람이 많아 보이는 가게로 들어갔다. 자유여행의 팁 아닌 팁이 있다면, '한국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정보를 지나치게 신뢰하지 않는 것'이지 않을까? 특히 식당을 선택할 때는 블로거의 추천보다는 현지인이 많거나, 가장 마음이 가는 곳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한국 최대 포털 사이트라고 할 수 있는 네이버의 개인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맛집'에는 한국 사람이 유난히 많다. 다들 누군가의 여행기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돌아가서 또 똑같은 여행기를 적어낸다. 블로그의 맛집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본인의 고향 또는 현 거주지의 관광 산업 현황을 조금만 뜯어봐도 관광객 맛집의 모순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현지인들이 찾는 맛집은 항상 따로 있으며,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식당의 음식은 대부분 현지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여행지에서 블로거의 추천을 따라도 좋고, 개인의 감정을 따라도 좋다. 한 가지의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취향은 남이 아닌 내가 만들어 가는 것. 여행지에서만큼은 결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현지인들이 많았던 식당의 음식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음식과 곁들인 와인을 한 모금, 두 모금, 그리고 세 모금 들이켜고 나자, 우리 사이를 막고 있던 벽은 금세 허물어졌다. 이 역시 도시가 여행자에게 주는 선물일 터다. 여행지에는 나이도, 고향도, 성격도, 취미도 다른 여행자들이 모이고, 그들은 곧 친구가 된다.


우리 다섯 명은 어쩌면 출퇴근 길에 잠시 옷깃을 스쳤을 지도 모를,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에도 정신없이 바빴던 청년들이었고, 또 각자 비슷한 시기에 파리로 여행을 떠나온 여행자였다. 여행의 목적은 달랐어도, 그 무렵에 흔히 가지고 있는 비슷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서로가 친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동질감이었던 것 같다. 방황하고 있는 게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꼈을 때 일종의 안도감이 물 밀듯 밀려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관공서라기엔 화려한 파리 시청사를 지나 센 강으로 향했다. 도시에는 이미 어둠이 내렸고, 파리는 치안이 썩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도시이지만, 우리는 다섯 명이고, 이때가 아니면 홀로 여행을 떠나온 여행자가 밤의 도시를 즐기는 건 목숨이 두 개가 아닌 이상 어려운 일이다. 그럼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을 즐겨야지 어쩌겠어? 모든 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강변에 줄지어 위치해 있는 바(Bar) 중에서 이번에도 마음이 가는 곳을 하나 정해 들어갔다. 여름과 가을의 어느 경계에 놓인 오늘의 날씨는, 여름의 온기가 남아있으면서도 강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스치면 겨울이 머지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 저녁에 마신 와인으로 몸이 살짝 따뜻해진 우리는, 가장 인기 있는 술이 무엇인지를 물어보고, 각자 원하는 술을 한 잔씩 주문해 밖으로 나왔다.



우리의 대화는 밤이 늦도록 계속되었고, 그렇게 파리에서의 첫날밤이 센 강의 강물과 함께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또 하나의 인연과 추억을 강변에 남긴 채 집에 돌아가는 길, 조금 전의 소란스러움과는 다르게, 센 강은 다시 침묵을 지키며 흐르고 있었다. 영문학의 가장 위대한 작가로 불리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말했다. '본래부터 좋거나 나쁜 일은 없다.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 강은 언제나 그저 흐르기만 할 뿐, 도시도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상황도 그저 일어나기만 할 뿐, 모든 것에 대한 정의는 오로지 인간의 몫으로 남겨진다.



그날 저녁 센강 너머에 보이는 노트르담 성당과 거리의 가로등이 만들어내는 고즈넉한 도시의 밤이 내게 주었던 선물을 되새기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을 걸으며 나는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이 도시를 떠나는 날, 나는 파리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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