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제단> 1부 [제단] - 3

3-(2)

by jeromeNa

정오가 되었다. 이수진이 근처 카페에서 사 온 샌드위치로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 MUL.APIN이 뭐예요?


이수진이 물었다.

샌드위치를 내려놓으며 로시가 대답했다.


- 바빌로니아 천문 문서예요. 대영박물관에 점토판이 있고요. 기원전 7세기쯤.


의자를 뒤로 젖혔다.


- 재밌는 게, 이게 고대 천문학의 집대성 같은 거거든요.

- 무슨 내용이에요?

- 별자리, 행성 궤도, 달력... 패턴이 엄청 정교해요.


박재원이 끼어들었다.


- 행성 주기 계산 때문일 거야. 고대인들은 행성 주기로 시간을 계산했거든.


펜을 돌렸다.

현진이 계산기를 켰다.


- 금성 263일, 화성 780일... 최소공배수를 구하면... 5694일이네요.

- 년수로는요?

- 15.6년. 거의 15년 8개월이요.

- 노트에 나온 숫자랑 일치하네요.


강윤서가 말했다.


오후 한 시. 로시가 설형문자 노트를 다시 펼쳤다.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사진을 봤다.


- 제가 어제 해독한 거 다시 볼게요.


모두가 모였다.

로시가 읽었다.


- 네르갈의 이름으로. 전쟁이 끝난 이곳에. 붉은 별과 흰 별이 만나는 곳에. 이 돌을 세우노라.

- 짧네요.


이수진이 말했다.


- 제단 헌정문이에요. 원래 간결해요.

- 전쟁이 끝난 이곳이라...


박재원이 중얼거렸다. 펜을 탁탁 두드렸다.

강윤서가 시계를 봤다.


- 도서관 가야 해요. 한경지략이랑 천관서 직접 확인해야 할 것 같아요.

- 누가 가요?


이수진이 물었다.


- 박 소장님, 저, 로시. 한문 해독 필요하니까.

- 알겠습니다.


로시가 노트를 덮었다.


- 현진 씨랑 이수진 팀장은 여기서 대기해 주세요. 연락 올 수도 있으니까.

- 네.


현진이 대답했다.


오후 두 시, OO대학교 중앙도서관. 강윤서, 박재원, 로시. 세 명이 고서실로 갔다. 삼 층 끝. 조용했다.

안에는 사서 한 명. 오십대 여성. 안경을 쓰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강윤서가 인사했다.


- 아르테 인사이트입니다. 고서 몇 권 열람하고 싶은데요.

- 어떤 책이요?

- 한경지략, 천관서, 개원점 경입니다.

- 신분증 맡기시면 됩니다.


신분증을 맡기자 사서가 책장으로 갔다. 책 세 권을 꺼냈다.

강윤서가 물었다.


- 혹시 김진수 교수님 아세요? 고고학과.

- 네. 자주 오시는 분이죠.

- 이 책들 보셨나요?


사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여름에 거의 매일 오셔서 이 책들 보셨어요.

- 어떤 부분을 주로요?

- 글쎄요...


사서가 생각했다.


- 천관서는 행성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한 번 여쭤보니까 금성이랑 화성 회합 관련된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세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

- 감사합니다.


강윤서가 책을 받았다.

열람실로 갔다. 조용한 공간이었다. 세 명이 앉았다.

박재원이 한경지략을 펼쳤다.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권3. 용산 부분을 찾았다. 한참 후.


- 여기요.


한문. 로시가 옆에 앉았다.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천천히 읽었다.


- 용산 서쪽 언덕에 옛 제단이 있다고 전해진다. 돌로 쌓았으며, 위에 별 그림이 새겨져 있다 하나 지금은 흙에 묻혔다.

- 별 그림.


박재원이 메모했다. 펜을 돌렸다.


- 천문도네.

- 18세기엔 이미 묻혀 있었다는 거죠.


강윤서가 천관서를 펼쳤다. 로시가 목차를 봤다. 행성 편을 찾았다. 화성 항목. 페이지를 넘겼다.


- 형혹성...


로시가 천천히 읽었다.


- 여기요.


한문 구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형혹과 태백이 서방에서 만나면 병화가 그친다.'

- 형혹이 화성, 태백이 금성이죠?


강윤서가 물었다.

- 네. 병화는 전쟁이고요.


박재원이 빠르게 적었다.


- 서방에서 만나면 전쟁이 끝난다.


로시가 개원점경을 펼쳤다. 금성 부분. 한참 넘기다가 멈췄다.


- 오, 이거요.

- '태백과 형혹이 서남방에서 만나 머무르는 곳, 그곳에 표를 세우면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침묵.

- 표가 제단이네요.


강윤서가 말했다.


- 네. 표석이요.


로시가 의자를 뒤로 젖혔다.

박재원이 노트를 봤다.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 고대 중국 천문서에 금성과 화성이 서남쪽에서 만나는 곳에 제단을 세우면 전쟁이 끝난다고 나와 있어요.

- 김 교수님이 그 기록과 조선 지리지를 연결하신 거네요.


강윤서가 말했다.


- 근데...


로시가 책을 덮었다.


- 왜 용산이죠? 서남쪽은 어디든 될 수 있는데.


박재원이 시계를 봤다. 세 시 오 분.


- 한경지략에 용산이라고 나왔으니까요.

- 그것만으로요? 18세기 전설 하나만 믿고?

- 그게...


박재원이 펜을 멈췄다.

강윤서가 단호하게 말했다.


- 뭔가 더 있었을 거예요. 김 교수님이 확신할 만한.

- 뭐가요?

- 모르겠어요. 노트에 안 나와 있는 거.


오후 다섯 시. 책을 반납하고 도서관을 나왔다. 밖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강윤서가 시동을 걸며 말했다.


- 연구실로 돌아가요.


차가 움직였다.

박재원이 노트를 봤다. 오늘 모은 정보들. 좌표, 각도, 날짜, 행성 주기, 고서 구절. 펜을 돌렸다. 천천히.


- 파편 같아요.

- 뭐가요?

- 오늘 얻은 정보들이요. 조각조각 있는데, 연결이 안 돼요.

- 연결할 수 있을 거예요.

- 어떻게요?

- 우리가 직접 계산하는 거죠. 김 교수님처럼.


여섯 시, 세 명은 연구실 도착했다.

현진과 이수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윤서가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오늘 확인한 내용을 추가로 적었다. 빠르고 정확하게.


고서 내용:
한경지략: 용산 서쪽 언덕 제단 / 별 그림 / 흙에 묻힘 천관서: 화성+금성 서방 회합 → 전쟁 끝 개원점경: 서남방 회합 지점에 표석 → 전쟁 방지


- 김 교수님이 이 문헌들을 종합해서 제단을 찾으신 거예요.


모두가 화이트보드를 봤다.

이수진이 조용히 말했다. 창밖을 보다가 화이트보드로 시선을 돌렸다.


- 하지만 발굴 지점을 정확히 특정하려면... 고문헌만으론 부족한 것 같아요. 시굴 조사를 여러 번 해야 하는데.

- 맞아.


박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펜을 탁 놓았다.


- 김 교수님은 한 번에 정확한 지점을 찾으셨어.

- 좌표 계산이에요.


현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 천문 데이터로.

- 그걸 어떻게 해요?


이수진이 물었다.


- 저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현진이 말했다.


- 기원전 280년 서울 주변에서 금성과 화성 합을 관측할 수 있는 지점을 역계산하면...

- 시간 걸리겠네요.


강윤서가 말했다.

- 며칠은 걸릴 것 같아요.

- 좋아요. 해보세요.

강윤서가 단호하게 말했다.


- 김 교수님이 어떻게 그 위치를 특정하셨는지 알아야 해요.

- 알겠습니다.


강윤서가 시계를 봤다.


-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다시 정리하죠.


하나씩 떠났다.

현진은 지하철을 탔다. 어두운 창밖을 봤다.


파편들. 좌표. 각도. 날짜. 행성 주기. 고서 구절.

하나씩은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연결이 안 되었다.

김 교수는 어떻게 연결했을까.


집에 도착해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내일.

천문 계산을 시작해야겠다.


눈을 감았다.


질문만 늘어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