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삶의 의미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겠다”는 말.
인생이 이렇게 힘겨운데, 왜 이 고통을 계속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절규. 의미가 사라진 삶은 마치 방향을 잃은 배처럼 흔들리고, 그 흔들림 자체가 또 다른 고통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는 이 탄식이 사실은 오류 위에서 출발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본래 어떤 사명이나 위대한 목적을 부여받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누군가가 손에 쥐여주는 “삶의 의미”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 그러니 의미를 논리로 증명하려 애쓰거나, 존재의 목적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을 벌이는 일은 종종 처음부터 잘못 놓인 퍼즐을 억지로 맞추려는 일에 가깝다. 없는 의미를 있다고 증명할 길은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허무주의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삶에 본래적 의미가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 문화가 제시하는 ‘성공의 틀’, 누군가가 강요하는 ‘올바른 삶의 표준’은 모두 선택사항일 뿐이며, 절대적인 진리나 과제가 아니다.
내 기쁨을 위하여 그러한 표준을 이용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남들이 정해놓은 굴레를 무의식적으로 따를 이유도 없고, 그렇게 산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당신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에게 굴레를 강요하고 착취하려는 사람들에게 순응해줄 필요는 조금도 없다. 그러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다.
의미가 없으므로 우리는 스스로 의미를 만들 자격을 갖는다.
그러니 나는 말하고 싶다.
정해진 답을 찾지 말고, 하루하루를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보라고.
진화심리학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은 단순하다.
함께 웃는 사람들, 관계에서 느끼는 연결감, 작든 크든 쌓여가는 성취감, 몸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생생한 순간들… 그 모든 것이 인간이라는 동물이 느끼도록 설계된 ‘작동 방식’일 뿐, 거기엔 무거운 의미도, 대단한 목적도 필요 없다.
기회가 있을 때 물에 뛰어들어보고, 좋아하는 사람과 많이 웃고, 마음이 움직이는 일들에 시간을 쓰면 된다. 문화가 제공하는 삶의 틀을 나를 위해 활용하는 것은 충분히 훌륭하다. 그러나 그 틀이 나를 규정하도록 둘 필요는 없다.
내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연결될만한 환경이 부족하다면 환경을 바꿔보려고 노력하고, 기술이 부족하다면, 단지 그 기술을 고치려고 노력하면 된다.
결국 우리는 어느 순간 무(無)로 돌아갈 것이다.
누군가는 오래 살다가 그때를 맞고, 누군가는 조금 이른 시간에 그 지점에 닿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후 몇십 년쯤 지나면, 이 세상은 대부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당연한 과정이다.
그러니 남은 시간 동안, 의미를 찾으려 애쓰기보다 살아보는 데 집중하자.
붙잡을 필요도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다.
무의미함은 우리를 위협하는 공허가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넓은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