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중요한 통찰 중 하나는, 우리가 감정을 혼자서만 조절하는 스스로 완벽한 존재가 아니고, 외부의 도움을 받아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정신분석가 비온의 ‘담아주기(containment)’라는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에 짓눌려 끙끙댈 때, 양육자가 그랬구나, 무서웠구나, 힘들었겠다고 말해주며 그 감정을 풀어내고 소화해 다시 돌려주면, 아이는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이전보다 훨씬 쉽게 조절할 수 있게 된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지만, 다룰 수 있는 형태로 바뀌는 것이다.
이를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거칠게 뭉쳐 있던 감정 덩어리를 '최적화'해 메모리 사용량을 줄여주는 과정과도 같다. 같은 정보라도 정리되어 있으면 시스템은 훨씬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감정의 외부조절은 부모–자녀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인 간의 관계, 친구 관계, 연인이나 부부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며 감정을 처리하고, 그 과정에서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정서적 부담을 나눠 갖는다.
감정 처리가 쉬워지면, 감정 조절에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많지 않은 사람들도 스트레스 상황에서 훨씬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서로를 외부 메모리로 삼아 감정을 저장하고 정리하는 일로도 볼 수 있다. 그런 연결 덕분에 인간은 감정 조절뿐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외부 환경의 스트레스에도 더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진화해왔다.
만약 지금 자신의 감정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개인의 의지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 메모리가 부족해진 상태는 아닌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 사회가 점점 더 개인화되고 파편화될수록, 사람들이 자신의 스트레스와 감정을 예전보다 잘 조절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