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을 믿으세요? 아니면 성악설을 믿으세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일하다보면 이런 질문을 가끔 듣게 된다. 사람을 얼마나 믿느냐를 돌려서 묻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난 원래 사람을 꽤 믿는 편이었고, 굳이 고르라면 성선설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하도 나쁜 사람들에게 당하다 보니 다들 나쁜 자식들인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성악설을 믿게 됐다.' 보통은 이런 맥락으로 질문이 오가는 것 같다.
그래서 누가 나한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뭐라고 대답할까 생각해보면, 솔직히 좀 애매하다. 둘 다 믿으면서도 둘 다 안 믿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보기엔 미움이라는 감정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경험되는 것 같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아기가 엄마에게 젖이나 분유를 먹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배고플 때마다 먹을 걸 주니까 너무 좋고, 엄마에 대한 사랑도 생길 거다. 그리고 아기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넘어서서 포유동물의 본능이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배고파서 우는데도 젖을 바로 주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다. 아기는 계속 울면서 기다리게 되고, 5분, 10분 이렇게 시간이 흐른다.
배고프고 너무 힘들 것 같다. 아기는 어떤 느낌일까. 물론 아직 생각이라는 것이 충분히 갖춰진 단계는 아니겠지만, 어떤 감정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기가 속으로 ‘엄마는 나를 사랑하시지만 사정이 있어서 늦어지는 거겠지, 엄마를 이해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할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기는 말을 못하니 정확한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유아들의 생각은 어느 정도 들어볼 수 있고, 어른이지만 사고방식이 유아적인 사람들의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듣는다. 그걸로 미뤄보면 아마 이런 감정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엄마 때문에 내가 배고프고 고통스럽다. 엄마가 밉다.’
얼마나 밉겠는가. 나에게 먹을 것을 줘야 하는 사람인데, 그걸 주지 않으면서 나를 힘들게 했으니 억울하고 밉다는 감정이 생기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난 잘못이 없잖아. 그런데도 고통스럽잖아.' 이런 생각일 것 같다.
정신분석가 멜라니 클라인은 이런 경험을 미움의 시작으로 보았다. 생후 3~4개월부터도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해하고 참는 기능을 담당하는 전전두엽은 훨씬 나중에 성숙하니, 개인적으로는 꽤 설득력 있는 설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미우면 나쁜 행동도 나올 수 있다. 다만 그걸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부르기보다는, 그 아기 입장에서는 자기가 당한 것에 대한 반응이자 일종의 복수에 가깝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밉고 공격적인 행동은 아기에게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성악설을 말하는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아기들은 미워할 수도 있지만, 아기들을 많이 만나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사랑도 정말 많이 할 수 있다는 걸. 그래서 아기 안에는 사랑과 미움이 같이 있는 것 같다. 우리 어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성선설이나 성악설이라는 것도,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는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같은 아기, 같은 사람을 놓고 누군가는 사랑을 보고, 누군가는 미움을 본 것이다. 보고 있는 면이 달랐을 뿐이다.
사람을 한 번도 미워해본 적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고, 그 미움은 대부분 ‘내가 당했기 때문에’ 생긴 감정일 것이다. 그 경험 하나를 이유로 인간 전체를 악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조금은 단순한 해석일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