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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음의태양 Aug 13. 2020

사십 대의 어느 날에.

#중년, 삶의 속도를 생각했다.

『 돌이킴의 끝에서, 삶의 속도를 생각했다.
    ...
그럼에도 그것이 이삼십 대의 치열함의 미덕으로 소용되었을지언정, 사십 대에는 좀 넉넉한 시간의 옷이 필요한 것 같다. 빈틈없이 날카로운 잣대는 늘어진 뱃살 드러나는 쫄티처럼 이제 내게 안 어울린다. 갑갑하고 각박하다. 남 보기에도 안 좋고 나도 불편하다. 야무지게 살려니 체력도 딸린다. 오래된 휴대폰처럼 일 하나 처리하면 어느새 배터리가 한 칸만 남는데.
아무래도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 할 때인가보다...
은유 산문집, 올드걸의 시집 중에서 』


나도 그랬다. 

내가 치열할 때는 오롯이 나에게 멈추어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단지 나에게, 나의 일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결혼을 하게 되면서 그의 일이 나의 일이 되었고. 그의 집안일이 나의 집안일이 되었다. 

아이가 생겼을 때 아이의 어여쁨만큼의 부담감도 낳았다. 

부양의 책임도 내가 살아온 세상을 설명할 의무도 낳았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숙명도 낳았으나 이내 절망해야 하는 필연도 낳았다. 


월급, 전세, 월세의 자본주의 원리는 부양이라는 가장의 그늘에 항상 갇히게 했다. 

다른 이들처럼 평범하게 키운다는 굴레에 나도 아이도 일상을 학원 셔틀에, 거처는 학군 둘레에 갇히게 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오롯이 나에게 치열할 수 없다.


그때 만나게 되는, ‘느림의 미학’. ‘삶의 균형’이라는 핑곗거리가 무지 반갑고 따뜻하다.

다만 굴레에 갇혀 멍해져 있으면 세상의 시간이, 내가 지나온 젊음의 시간이 덧없음을 실감한다. 


나도 버거운데 내 집안일에 그의 수고의 짐을 지워야 하는 설명의 부담은 더 버겁다. 

그 노력도 구차하여 체념하고, 그 부담의 대가로 예상되는 오해를 받는다.


장거리 운전으로 방전된 체력은 수일에 걸쳐 일상을 반복해도 도무지 회복되지 않는다. 

속이 탈 여유도 기력도 안 난다. 


이른 저녁 아이들의 조잘거림을 받아줄 수도 없는 체력이 원망스럽다. 


다시 내일의 밥벌이를 위해 몸을 뉘어본다.

(편혜영, <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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