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얼음의태양 Dec 04. 2020

취한 밤, 집으로의 먼 여행이 시작된다

코로나의 역설, 고단한 여행을 멈추다

술자리의 마지막은 항상 기억이 흐릿하다.

항상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맥주 입가심만 딱 한잔 하자’, ‘입가심 딱~ 한잔’이라고 내가 이야기해놓고, 정작 내 기억은 없다.

술에 축축하게 젖었을 무렵, 시원한 맥주 몇 잔과 함께 있다가 내 말이 끊기거나 주변이 조용해지면,

나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지인들은 너무 자연스럽게 나를 그 상태로 두고 자리를 이어갔다.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매번 술이 몸에 충분히 차오르면, 자는 게 무슨 버릇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술잔을 앞에 놓고, 앉은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정말 깊이 골아떨어지게 된다. 주변의 상황에 개의치 않고 정말 푹 잠이 든다.


같이 자리를 함께 하던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며, 

“이제 조금만 있으면 잠들 거야..” 하는 말들이 듣기가 싫어서 몇 번은 버텨보았지만,

정말 술이 취하면 나는 어김없이 자는 순간들이 자주 이어졌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들은 전리품처럼 내 잠든 사진을 공유하곤 한다.


내가 언제부터 술에 많이 취하면 잠이 들어버리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지인들도 일종의 내 잠의 주사(?)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앉은 자세로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잠이 들었다가 자리를 파할 때쯤이면, 나는 다시 정신이 든다.

짧은 순간 깊이 잠들어 어느 정도 술이 깬 효과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효과도 잠시.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날에는 정말 대책이 없어진다.


지하철 종착역과 가까운 곳에 살 때에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매번 종착역까지 잠이 들어도, 집까지는 많이 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다시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은 종착역까지 도착을 해서 돌아가는 택시비를 아끼려고, 반대편에서 출발하는 지하철을 다시 탔다가

왔던 길을 40분 이상 다시 돌아가서 정신을 차린 적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반대편에서 지하철을 타고 정신을 차려 내린 곳은 집 근처 역도 아닌, 아까 출발했던 그 종착역.

순간 우습고 무서운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정말 집에 갈 수 없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불연 듯 스쳐 지났다. 택시비를 아끼려다 결국은 오랜 시간을 들여 끝내 택시를 타는 웃픈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냥 처음부터 택시를 타지 그랬어”


4호선은 더 심했다.

십수 년 전에는 4호선을 타고 일어나 내린 곳이 오이도 역이었다.


몇 해 전 택시가 파업을 하던 날도 나는 술에 취해 있었다.

그날따라 사무실에서 어떤 이상한 예감에 휩싸여 무지 스트레스를 받은 터였다.(그럴수록 나는 술을 더 급하게 많이 먹게 된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출발했는데, 내가 내린 곳은 정말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2호선이 순환선이라 그곳도 서울이었다는 것.

그러나 택시가 아니면 집에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는데, 그날따라 택시는 파업이었다.

지하철은 곧 끊길 시간.

나는 다시 반대방향으로 지하철을 타고, 집과 제일 가까운 곳으로 일단 가기로 했다.

지하철을 내린 그곳에서, 나는 한참 동안 걷고 걸어, 집에 갔던 기억이 있다. 참 길고 긴 밤이었다.

걷다가 라면도 먹고, 또 걷고, 화장실 가고, 걷고 또 걸어오던 고단한 여행길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을 못 자고 출근한 그다음 날, 전날의 그 이상한 예감처럼 나는 인사발령을 받아 다른 부서로 이동하였다.


요즘은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동네에 산다.

다행히 버스 종점까지는 간 적은 없지만, 제법 교외까지 나가서 다시 택시를 타고 오는 적이 많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술에 취한 후 타는 버스와 지하철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집에 제대로 갈 때까지 더 피로해져서 그렇지, 정신을 차릴 때까지는 정말 편히 잠을 잔다.


참 이상하다.

술에 잘 취하지 않으면, ‘딱 한잔만 더’를 외치며, 술자리와 술을 더 고파하면서도

술에 절여지게 되면, 모든 상황들을 다 놓을 만큼 바로 눈을 감아버리는, 

그리고는 집도 단번에 가지 못하는 한심한 상황인 것이다. 


이쯤 되면, 술을 끊던가, 아님 자제를 해야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코로나로 강제 휴점 중이다.

정확히는 여럿이 같이 먹는 술이 휴점이지, 혼술은 영업 중이다.

혼자 하다 보니 많이 먹지도 않는데도 금방 취하고

취했다 싶어 잠이 들었는데도 침대 옆 바닥이니, 오히려 집을 찾아다니는 번잡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가족들이 다 잠이 든 후에 빠져드는 혼술이라

더 절묘하게 운치 있고 맛깔나는 경우가 있어서 매력이 있기도 하다.


창문을 열어놓으면 찬바람이 몰아쳐 야외 테라스에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베란다에 혼자 앉아 있으면, 술냄새 나는 글귀들이 툭툭 떠오르기도 한다.


혹자는 왜 혼자 먹냐고, 술은 부부랑 함께 해야 하지 않냐고 물어보지만..


알만한 사람은 안다.

술을 부부랑 함께 하면 더 싸운다.


끝도 알 수 없는 코로나의 시기에

오늘도 나는 작은 잔과 소박한 찬그릇과 앉아 있다.


사람이 그리운 불면의 밤에,

오늘도 술에 기대어 잠을 청해 본다.


한낮의 스트레스 상황을 떠올리며 한 잔.

내일 풀어갈 일의 방향을 가늠하며 한 잔.

잘 풀리지 않는 인간관계의 매듭을 생각하며 또 한 잔.

저녁 식사 시간에 아내에게 들은 잔소리가 다시 들려 연거푸 두 잔-

핸드폰을 뒤적거려 심란한 기사를 보며 또 한 잔.


그리운 이들을 두어쯤 떠올리며 또 한 잔.

.

또 한 잔.

..

그리고 또...

.

.

이 불면의 밤은 취면(就眠)의 밤이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