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매콤하다 못해 알싸한 (2)
다시 취업 시장에 몸을 던졌으나 지난 기간의 담금질 덕분에 '이것도 버텼는데 어디든 취업은 되겠지'라는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인 사이트를 몇 번 뒤적거리던 나는 다시 비교적 쉽게 취업하는 길을 선택했다. 자기소개서를 하루에도 몇십 개씩 뿌리고, 스터디에 출석하고, 내 스펙을 높이는 대신 나를 받아줄 만한 회사에만 이력서를 쓰고, 그중에 나를 받아주는 곳에 취업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딱히 가고 싶은 회사는 없었지만 그나마 도전해보고 싶어진 직종은 생겼다. 바로 마케팅이었다. 원래도 Z사를 지원했던 이유는 마케팅과 관련된 직무가 있기 때문이었으나, 실제 입사 후 배정된 팀은 마케팅과는 전혀 연관이 없던 팀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대학생 때보다 더 마케팅 쪽에 지원을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마치 누군가 막으면 반대로 튀어 오르는 탱탱볼과도 같았다. 그렇지만 화려한 마케팅 공모전 이력도, 포트폴리오도, 대학원 학위도 없었다. 내게 있는 건 45학점의 경영학과 복수전공 수료를 증명하는 경영학사 학위와 마케팅과는 무관한 기업의 인턴 이력뿐이었다. 고스펙이 널린 마케팅 취업 시장에서 내가 알만한 기업의 마케팅팀이 날 받아줄 리는 전무했다.
6개월 만에 새롭게 취업한 곳은 디지털 마케팅 대행사의 기획 업무였다.
여기서 대행사의 기획자, AE로 불리는 직업에 관해서 간단한 설명을 붙일 필요가 있다. 네이버에 검색하면 <대행사와 광고주 사이의 연락 및 기획 업무를 담당하는 책임자>라고 나오지만, 우리끼리는 우스갯소리로 AE의 뜻을 이렇게 정의하곤 한다.
기획자라고 부르지만 기획부터 실무까지, 비딩(경쟁 입찰)에 참여하기 위한 제안서 기획 및 작성 같은 큰 그림을 그리는 것부터 카카오톡을 통해 실시간으로 날아오는 자잘한 소통까지 모두 AE의 손길을 거쳐서 조율된다. 한 마디로, 입사 후 직접 겪어보니 이 직무도 생각보다 해야 할 일이 엄청나게 많더라. 인턴을 마치며 새벽까지 일하는 야근만은 피하겠다고 다짐했건만 어느새 짧으면 일주일에 한 번, 길면 거의 3개월 동안 야근을 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일이 나를 쫓아다니는 것인지, 내가 일을 쫓아다니는 것인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입사한 X사는 Z사보다 훨씬 버틸만했다. 우선 분위기가 한몫을 했다. 보수적이었던 Z사와는 다르게 분위기도, 근무시간도 유연한 편이었다. 좋은 사람들도 만났다. 배울 점이 많았던 멘토 같은 상사도 있었고, 처음에는 어수선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잡혀가는 팀워크도 좋았다.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발전을 느꼈다. 월등하다고는 못해도 지난해와 올해의 나를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이 체감되었다. 업무 강도는 비슷하게 고되지만 버틸만한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그렇게 상사들에게 '한 번 키워볼 만한', '믿고 일을 시켜볼 만한' 인력으로 분류되기까지는 3년 남짓이 걸렸다.
사실 상사들의 그런 평가가 낯설지는 않았다. 인생에서 윗사람에게 쓴소리를 들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딱히 손댈 것이 없는 학생이었다. 크게 사고를 치는 일도 없었고, 성적도 늘 중상위권을 유지했다. 남들한테 지고 못 사는 성격도, 선생님들에게 예쁨을 받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내 학창 시절이 얌전하게 지나간 것은 사고를 친 뒤에 감당해야 할 선생님과 부모님의 질책이 내게 더 큰 스트레스였기 때문이었다. 크면서 많은 것이 변한다지만 그 성격과 성향은 변하지가 않아서 나는 대학생 때도 성실한 학생, 아르바이트에서도 성실한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그리고 직장에서도 그런 신입이 되었고, 주임이 되었고, 대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야 이런 과거가 오히려 나에게 독이 되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성실한 행실이 누군가에게 질책을 받기 싫다는 이유에서 비롯된 결과라면 그것이 옳은 것일까, 스스로 의문을 가져본다. 이제 와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