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죽을 각오로 출근했습니다

4. 삐용삐용

by 제리에이치

잘 움직이던 핸드폰이 잠깐 멈춘다. 애플워치를 찬 왼쪽 손목에서 진동이 울리고 핸드폰에는 어두운 화면에 발신자의 이름이 뜬다. <B사 ㅁ팀 ㅇㅇㅇ과장> 한 번에 알아보기 쉽게 저장한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손에는 땀이 차고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당장 쥐구멍에 숨어서라도 전화를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애써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 위해 몇 번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는다. 네, 과장님. 전화받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얘기했다. 전화를 싫어하는 것 치고는 전혀 긴장한 내색이 보이지 않는다고. 바랐던 모습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정도는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날 이후로 몇 달 동안 전화가 울릴 때마다 불안 증세가 찾아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끝은 차가워졌다.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전화를 받지만, 그때마다 긴장으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처음에는 번아웃 증상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그전 해 여름부터 거의 반년이 넘게 줄이은 야근과 엄청난 업무량을 소화한 터였다. 원래도 전화 업무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장기간 이어진 과로와 여러 사건들로 인해 나타난 일시적인 불안 증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팀이 바쁜 시기에, 무리인 줄 알면서도 모른 척 일주일 휴가를 내고 해외로 도망쳤다. 예정에 없던 휴가였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머리를 식히면 괜찮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휴가에서 돌아온 후에는 신규 고객사인 C사를 전담하게 되었다. 사실 완벽하게 떨쳐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으나 팀이 바쁜 기간에 혼자서 일주일간 쉬었으니 그만큼 더 많이,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군말 없이 새로운 업무를 받아들였다.

마케팅 대행사에서 4년간 근무하며 느낀 점은, 이러나저러나 쉬운 광고주는 없다는 점이다. 어떤 광고주는 일을 하지 않아서 힘들고, 어떤 광고주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힘들다. 어떤 광고주는 러프한 가이드조차 주지 않아 힘들고, 어떤 광고주는 마이크로한 부분까지 모두 컨트롤하려 해 힘들다.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힘든 법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담당한 광고주는 수없이 이어지는 수정으로 AE를 힘들게 하는 유형이었다.


문서를 작성하면 그에 대한 수정은 20번씩 따라왔다. 마치 청기백기를 하는 것처럼 a 넣고 b 넣어주세요, b를 빼고 c 넣어주세요, a랑 c를 합치고 d를 넣어주세요 식의 수정들이 20번씩 반복되었다는 소리다. 처음에 하나였던 문서는 점점 늘어났고, 문서와 별개로 진행해야 하는 실무도 있었다. 매일 야근을 했지만 혼자서 해내기에는 현실적으로 역부족인 업무량이었다.


더군다나 C사가 전문적인 분야를 다루는 관계로, 이 일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사람은 사실상 나 혼자밖에 없었다. 팀장님은 중간에 바뀌면서 히스토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팀원들에게 도움을 청하기엔 일이 너무 복잡해졌다. 누군가와 아예 업무를 분담하면 모를까, 하루이틀만 도움을 받기에는 내가 업무에 대해서 설명하고 한 번 더 확인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결국 수많은 업무는 혼자서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점점 업무량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오늘만 사는 하루살이처럼 나는 당장 하지 않으면 X 되는 일들만 간신히 처리하고 나머지 일들은 다음 날로 넘겼다. 다음 날이 되면 또 그날 하지 않으면 X 되는 일들만 간신히 처리했다. 도움을 요청해보기도 했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도움을 받아도 받는 것이 아니었다. 업무에 누수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게는 구멍이 난 독을 막아주는 두꺼비도 없었고, 마법으로 업무를 끝내주는 요정 할머니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책임지려고 하는 것이 바보 같은 생각이었을까? 어쨌든 그때의 나는 그랬다. 이러나저러나 내가 책임지고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어 나오는 업무는 양손과 양발로 틀어막아도 자꾸만 삐져나왔다. 주말에도 쉬는 것이 쉬는 것 같지 않았다. 금요일 퇴근부터 돌아올 다음 주 월요일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우면 다음날 나를 깔아뭉갤 업무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당장 그날 하지 않으면 망하는 업무들이 뭐가 있지? 머릿속으로 필터링을 돌리기 바빴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광고주의 연락이 무서워졌다. 또 새로운 일이 올까 봐 무서웠고, 기존에 누수가 생긴 업무를 알아차렸을까 무서웠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안 그래도 부족한 업무 시간을 또 써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엊그제도 주말에 출근했고, 어제도 새벽에 퇴근했는데 오늘은 언제 퇴근하게 될까. 이미 내 체력은 다한 지 오래인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전화가 무서웠다. 전화가 울리는 순간 식은땀이 났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다음에는 카톡이 무서워졌다. 팝업만 봐도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간신히 미리보기만 확인한 후 회의나 외부 미팅을 핑계로 답장을 늦게 하기도 했다. 그다음에는 메일조차 무서워졌다. 핸드폰의 팝업으로 회사 메일의 알람만 떠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쿵, 가슴에 돌덩이가 떨어지는 느낌을 하루에도 수백 번씩 받았다. 나중에는 전화도, 카톡도, 메일도 덜덜 떨면서 확인을 해야 했다.

업무 연락뿐만 아니라 친구들의 연락도 마찬가지였다. 알람만 봐도 공포감이 몰려오는 이유로 가벼운 안부 연락에도 답장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광고 메일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스팸 메일인 것을 확인한 후에야 놀란 가슴을 가라앉혀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내가 생각해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사실 심각한 상황이 되기 전부터 내 상황을 알고 있는 가까운 사람들은 상담을 권유해 왔다. 그러나 정작 나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증상이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상담센터와 정신과 중에서 나에게 맞는 곳을 알아보기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그렇지만 이젠 스스로도 알았다.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삐용삐용, 응급 상황을 알리는 빨간불이 켜졌다. 당장이라도 흔적도 없이 와르르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위태로운 상태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오늘도 죽을 각오로 출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