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하얀 병원
2023년 9월. 건강검진 결과가 이메일로 날아왔다. 건강검진에는 간단한 설문으로 진행되는 심리검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결과에 따르면 나는 <경미한 수준의 불안감과 약간 심한 수준의 우울감을 자주 느끼며, 심각한 수준의 적응 스트레스를 자주 느끼는> 상태였다. 놀라울 것도 없는 결과였다.
그때는 불안감과 우울감이 끝도 없이 치솟고 있던 상황이었다. 나에게로 오는 모든 연락이 무서워 저녁 아홉 시부터 핸드폰을 수면 모드로 돌려놓았다. 핸드폰은 끌 수 없지만 알람은 받고 싶지 않았던 나에게 있어 최대한의 회피였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연락이 오면 '미안, 수면모드라 못 봤어'라고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사람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가장 무서웠던 사람은 C사의 담당 광고주였다. 그에게서 오는 연락이 지긋지긋한 수준을 넘어 공포로 다가왔다. 공포감이 극에 달했을 때는 그가 이 일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으면 했다. 그때부터였다. 매일 아침 알람이 울리고 회사에서 도망가고 싶어질 때면, 회사의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 상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유서에 광고주의 이름을 쓰고 내가 삶의 마지막을 결정하게 된 것은 오롯이 당신 때문이라며 똑똑히 적어놓고, 옥상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회사 사람들이 목격하는 상상을 했다.
우습게도 그런 상상을 하면, 출근할 힘이 생겼다.
정말로 죽기 위해 출근하던 때가 있었다. 하얀 A4용지 위에 적힐 유서의 내용은 머릿속에서 점점 구체화되었고,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키고 싶어 엉덩이가 움직이는 것을 간신히 참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일어나려는 엉덩이를 잠재우면 눈물이 나왔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회사에서 엉엉 울었던 것 같다. 한 마디로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병원에 가게 된 것은. 병원에 가게 된 것도 완전한 나의 의지는 아니었다. 내 상태를 지켜보던 팀원들이 나 대신 회사 근처의 정신과들을 찾아보았고, 전화를 무서워하는 상태를 고려해 인터넷으로도 예약이 가능한 병원을 추천해 주었다. 내 주위에 이렇게까지 나를 신경 써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정성을 무시하기도 쉽지 않은 법이다. 결국 등 떠밀리듯이 회사 근처의 정신과 상담을 예약하게 되었다.
내가 어릴 때, 그러니까 정신과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좋지 않았을 때에는 정신병원(정신과)을 '하얀 병원'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정신과는 몸이 아픈 것처럼 정신이 아플 때 찾을 수 있는 병원이고, 우울증 역시 감기처럼 앓을 수 있는 증상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만약 그런 인식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병원도, 상담센터도 갈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간 병원은 따뜻한 분위기에 좋은 향기와 조용한 정적이 감도는 곳이었다. 건강검진 때 했던 설문조사보다 훨씬 자세한 검사를 다섯 개 정도 하고, 상담실로 들어갔다. 어떻게 오시게 됐냐는 의사 선생님의 질문에 답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저는 그렇게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직장 동료들이 권해서 오게 됐어요.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 앞에서까지 거짓말을 했던 이유는 혹시라도 검사 결과가 '정상입니다'가 나왔을까 봐. 그러면 내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한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아서였다.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연히 불행에 가깝지만) 검사 결과는 심플했다.
우울증과 불안 증세가 상당히 심각한 편이다.
30분 정도 상담을 이어간 후 항우울제 한 알을 처방받았다. 나중에 이 처방은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를 포함해 다섯 알까지 늘어나지만 시작은 그랬다. 약봉지를 받아 들고 다음 방문일을 예약하고 집으로 가는 길, 기분이 이상했다. 살면서 정신과를 갈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렇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있었다. 건강검진 결과를 보고도 외면해 왔지만, 이제는 명백했다. 나는 정신과 환자가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