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평화와 고독 사이
병원을 다니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내가 상당히 예민하다는 것이다. 원래 감정표현이 크게 없는 무던한 성격이라 내가 예민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내게는 의외의 사실이었다. 여기서 '예민하다'는 '까칠하다'와 결이 다른데, 외부에서의 자극을 버티는 힘이 약하다는 뜻이다. 건드리면 깨질 유리구슬, 혹은 쿠크다스, 아니면 개복치 정도로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퇴사면담을 할 때 날 4년간 봐온 본부장님이 하신 말씀도 그랬다.
네가 이 일을 해내기에는 맷집이 없는 것 같아.
나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하다 나온 이야기라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고 어떤 의미인지도 충분히 이해했다. 이 일을 제법 잘 버텨내는 팀원들 둘은 성향이 서로 달랐다. 한 명은 넉살이 좋고 언변이 뛰어나 상대방을 잘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언변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성격이 단단해 상대방이 어떤 소리를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둘 다 아니었다. 언변이 뛰어나지 못해 설득도 어려워하는 주제에, 상대방의 날 선 말은 그대로 다 속에 담아두고 끙끙 앓는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일인데 여러 가지 이유로 남들은 받지 않을 스트레스까지 몇 배로 끌어안고 있었으니 탈이 나지 않을 리가.
그렇게 충동적으로 퇴사를 선언하고 두 달 뒤, 약 4년을 함께한 회사에서 마지막 출근까지 마쳤다. 조금은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그렇게 슬프지 않더라. 처음에는 연차를 며칠 쓴 것 같아 하루종일 쉬는 스스로가 낯설었으나, 한 달 뒤 통장에 들어오는 마지막 월급을 확인하고 나서야 진정한 백수가 된 것을 실감했다.
외부에서 부는 작은 입김에도 흔들리는 갈대가 되었던 나는 혼자가 되고 나서야 평화를 찾았다. 아침 느지막한 시간에 일어나 점심에는 책을 보거나 영어 공부를 했다. 산책도 빼놓지 않고 했다. 일주일에 두 번 저녁에는 취미로 시작한 발레 학원에 갔고, 밤에는 일기를 쓰고 잠들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진정한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왔던 시간들인데 왜일까, 너무나 외로웠다. 나는 원래 혼자서 식당도 가고, 쇼핑도 하고, 여행도 가고... 혼자서 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리고 한 번도 외롭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았고, 못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혼자일 때 더 자유롭다고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외로워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게 답일까 싶었다. 그래서 퇴사 후 한 달 동안은 그렇게도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새로운 모임에도 가입하고, 퇴사를 이유로 약속도 수없이 잡았다. 그렇게 매일같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돌아다녔지만 외로움이 해결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술김에 이 마음을 토로했을 때, 누군가는 얘기했다. 소개팅 필요해? 다른 누군가는 얘기했다. 너 이럴 때 남자 만나면 파국이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얘기했다. 그건 외로운 게 아니라 공허한 거야.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있던 곳에서 떨어져 나온 거잖아. 소속감이 없어진 거지.
그제야 실마리가 조금은 풀린 기분이었다. 그곳을 나온 것은 나의 의지지만, 하루에 9시간이 아니라 12시간, 15시간도 있던 곳이 한순간 사라졌다. 비어버린 것은 단순히 시간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약 4년을 몸담았던 곳이 어느 날부터 엑스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큰 마음속 파장을 불러왔을지도.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흘러 4월이 지나고 5월이 되었다. 새롭게 만나는 사람도 없고, 애써 약속을 잡지도 않지만 외롭지는 않다. 아침에는 좋아하는 선수가 소속되어 있는 미국 야구를 보고, 먹고 싶은 시간에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글을 쓰다가, 저녁에는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다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그저 물 흐르듯 흘러가는 이 시간이 고독하다기보다는 평화롭기만 하다. 하루종일 혼자서 노는 것이 보잘것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어떠한 강요와 압박 없이 내 생각대로 보내는 요즘의 일상이, 나는 행복하다.
이제 알았다. 그간의 외로움은 회사와의 이별을 적응하는 시간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