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꿈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어렸을 적 내 장래희망은 일곱 개였다. 꿈이 너무 많아 하나로 정할 수 없어 하루에 하나씩 직업을 돌아가면서 하고 싶다는 야심 찬 목표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성장하면서 그렇듯, 수많은 장래희망은 소거법으로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화가? 나는 알고 보니 그림엔 영 소질이 없었다. 한의사? 한자 공부하기가 너무 싫었다. 미용사? 크면서 흥미를 잃었다. 나 자신을 알아갈수록 장래희망 칸에는 쓸 말이 없어져갔다.
그러다 잠시 꿈이 한 번 더 생기긴 했다. 방송국 PD였다. 학창 시절 당시 유행하던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의 영향이었다.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하는 프로그램을 책임지고 이끌고, 샘솟는 아이디어로 일반 직장인보다 자유롭게(라고 생각했다) 일하는 근무 환경이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당시 이름을 날리던 PD들은 공교롭게도 명문대학교의 신문방송학과 출신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생각은 대부분 비슷한지, 내가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 전국의 <신문방송학과>, <언론정보학과>,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등 미디어와 언론을 다루던 학과의 경쟁률은 문과에서 최상위권의 경쟁률을 자랑했다. 수능 성적표를 받아 든 나는 다시 현실과 타협하여 나를 합격시켜 준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렇게 내 꿈은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또 한 번 사라졌다.
취업준비생에 가까워지게 되면서 하고 싶은 것도 없어졌다. 몇 년씩 치열하게 준비해 들어가고 싶은 대기업도 없었다. (물론 들어가게 해 준다면야 감사합니다 넙죽 절하고 들어갈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지금의 내가 생각해도 양심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었다.) 노량진이 박터지던 그 시절,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공기업에 입사하거나 공무원이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꼭 이루고 싶은 꿈도 없었고 하다 못해 들어가고 싶은 꿈의 직장도 없었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 ‘워라밸이 중요하다’ 등 특별히 원하는 조건도 없었다. 그저 ‘추울 때 따뜻하고 더울 때 시원하고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 회사’이면 족했다. 강산이 두 번도 바뀌기 전에 일곱 빛깔 무지개였던 꿈은 이도 저도 아닌 회색이 되어버렸다. 아니, 회색도 아니고 잿더미가 돼서 허공에 날아갔다고 해야 하나.
그렇지만 내 꿈이 무지갯빛이든, 회색이든 상관없었다. 심지어 다 불타서 흩날려버려 손에 쥐어지지 않는 재가 됐을지언정 스스로 먹고살기 위해서 취업은 해야 했다. 한국사, 컴퓨터 활용 능력, 토익, 토익 스피킹, 교외 동아리 활동까지. 꼭 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는 못했지만 나 자신에게 부여하는 명분은 별로 효력이 없었다. 이유를 못 찾으면 어쩔 건데. 안 하게? 그럴 수는 없으니 남들처럼 살기 위해서 남들이 하는 기본적인 것들은 모두 다 따라 했다. 차라리 내 장래도 교학사나 진학사 어플라이가 정해줬으면 싶었다. 어떤 회사와 직무를 넣으면 삑, 상향입니다. 삑, 적합입니다. 삑, 부적합입니다. 신호등 알림을 띄워주고 거기에 맞춰서 지원만 누르면 얼마나 편할까.
결국 복수전공인 경영학과 교수님께 면담을 신청했다.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지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나마 하고 싶은 건 마케팅인데 공모전 경력도 없고, 주전공도 아니고, 학점이 높은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어요. 어떡하죠? 평소에도 학생들의 고민을 진심으로 대해주시던 친절한 교수님께서는 시원하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대학원을 가세요!’ 생각도 못한 답변에 당황했다. 음. 그건 할 수 없는 길인데. 다시 한번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사정상 대학원을 갈 수 없어서요.’ 교수님께서는 한 분야를 제안하셨다. 정말 힘들지만 1년만 버텨도 경력에는 도움이 되는 곳이며, 인력난이기에 취업도 어렵지 않다고. 그리고 적성에 맞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말까지 덧붙이셨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던 나는 될지 안 될지 모르는 몇 년에 희망을 걸기보다는 졸업 후 빠르게 취업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 회사가 정확히 뭐 하는 곳인지도, 내가 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시켜주면 열심히 할게요. 그렇게 졸업 후 두 달 뒤, 나는 강남 테헤란로의 한 회사에 전환형 인턴의 합격 통보를 받았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이때 내가 구체적인 꿈을 꾸고 노력 끝에 원하는 직업이나 직장을 가지게 됐더라면 이런 시련이 다가왔을 때 무너지지 않고 극복해 낼 수 있었을까? 몇 번을 되물어봐도 이미 지나간 과거이므로 답은 영영 알 수 없는 일이 돼버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