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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날개 Sep 20. 2020

[산티아고 순례길] 홀로 까미노, 치유로 가는 길

[4일] #1. 수비리에서 빰쁠로나 (Pamplona) 가는 길


아침 식사,  빵이 달랑 하나 남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침 식사를 하고 떠났다. 냉장고를 열어 주스와 우유, 떠먹는 요구르트를 꺼냈다. 콘프레이크에 우유를 붓고, 빵 한 조각에 버터와 잼을 발라 대충 먹었다. 로만손 일행도 지금 막 식사를 끝내고 빨래를 거두고 있었다. 내 뒤로 독일 부자가 내려왔다. 빵이 없자, 그들 역시 냉장고를 열고 뭔가를 찾아서 먹는다. 아침 식사는 차려진 것들을 중심으로 객들이 알아서 먹는 분위기였다.




마당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았다. 스틱과 등산화를 챙겨서! 문득 순례자 여권에 수비리 흔적을 안 남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자신들은 어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주인장이 찍어줬단다. 숙박비에, 식사비까지 계산하느라 까먹었나? 한쪽 전단 테이블에 도장이 있었다. 힘껏 찍어봤다. 안 찍혔다.


로만손이 왔다. 도장을 못 찍었다고 하자,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내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꾹 눌렀다. 찍혔다. 아니 이게 무슨 조화인가? 마술이다. 내가 신나서 팔짝 뛰자, 주변 순례자들이 같이 좋아한다. 도장을 뒤집어서 찍어야 잉크가 나오는 구조였다. 오, 내게는 첨단이다.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로만손에게 박수를 보냈다. 로만손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자기는 슈퍼맨이라고 했다. 로만손은 유쾌한 사람, 친절한 사람, 나의 천사이자 슈퍼맨!


<알아두면 좋아요>

'세요'는 순례 여정을 증명하는 도장이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등록을 위해 실제 여권과 순례자 여권인 끄레덴시알을 내게 된다. 지역과 숙소 이름, 날짜가 새겨진 도장을 찍어주면 그날 방문한 순례지의 흔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독특한 모양과 색깔이 담긴 도장이 채워지면서 순례자 여권은 다채롭고 아름다운 자기만의 순례 흔적이 된다. 성당이나 식당, 카페, 바 등에서도 받을 수 있는데, 이때는 본인이 직접 찍고 날짜를 기입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거쳐왔던 길의 흔적을 도장과 함께 남기면서 순례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무턱대고 가는 곳마다 다 찍다가는 나중에 칸이 모자라서 또 다른 순례자 여권을 필요로 하게 된다. 보통 2 유로면 살 수 있지만 의외로 살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잘 조절해서 찍을 필요가 있다. 산티아고 100킬로 전부터는 하루 두 개의 도장을 찍어야 한다는데, 어쩌다 한 두 개 빠져도 증명서 발급 사무실에서는 큰 문제를 삼지 않은 듯하다.  다만, 본인이 다양한 세요가 찍힌 끄레덴시알을 보면 뿌듯하리라. 숙소와 성당, 기억에 남는 카페와 바들을 하나씩 찍다 보면 순례자 여권은 순례자의 추억을 담은 소중한 발자취가 될 것이다.






오늘도 배낭을 동키로 보낼 것이다. 순례에 적응하는 동안 필요했다. 오르막에서, 내리막으로, 또 내리막에서 오르막으로! 아직 많은 단계들이 남아있다. 발이 아파서 무거운 배낭까지 메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동키 회사 봉투에 돈을 넣고, 가고자 하는 지역과 숙소 이름을 적었다. 전날 주인장에게 괜찮은 숙소를 안내받았다. 평가 좋고 만족도 높은 곳에 연락해준다더니, 이미 자리가 찼단다. 그다음 괜찮은 곳이라며 찾아준 곳에는 다행히 자리가 남았다고 했다. 직접 예약까지 해주었다. 커미션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숙소들끼리 서로 서비스 차원으로 예약들을 해준단다. 소개받은 집에서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숙소 안내로 이미 침대를 예약했으면 그걸로 된 거였다. 성수기가 아니라 안심했는데 계속 부킹 전쟁이라니! 성수기에 공립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늦게 도착한 순례자들에게 좋은 자리가 남긴 힘들 것이다. 설령 있다 해도 2층이나 입구 쪽 불편한 자리들 일 확률이 높다. 간혹 노인들과 아픈 자들을 위해 1층 침대를 서 너 자리 남겨두긴 한다. 물론 그 자리도 도착하는 순서다. 그래서 걸음이 느리거나 나이 먹은 사람들은 사설 알베르게를 찾는다.   



회사마다 봉투는 다르지만, 적는 란은  비슷하다. 이름과 전화, 가려는 도시와 호텔을 기입하고 봉투에 돈을 넣고 배낭에 매달면 끝!


떠나기 전에 식당에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동키 짐을 놓는 곳을 로만손이 알려줬다. 그들도 이제야 배낭을 싸서 동키 보낼 준비를 했다.

"큰 배낭은 왜 그대로 메고 가세요?"

"셋이 모아서 하나만 보내는 거예요. 무거운 것만 추려서 보내고, 기본은 배낭에 다 넣었어요."

내 옆 의자에 로만손이 앉았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없이 등산화를 신었다.

마마드와 아란이 어느새 내려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오늘 어디까지 갈 거야?"

"빰쁠로나요! 다음 코스니까, 가야죠."

"그렇지. 우리도 거기까지 갈 거야! 힘이 들어서 천천히 가겠지만! 숙소는?"

"어제 여기 주인장이 예약해줬어요."

"공립으로 안 가고?"

"공립은 제가 일찍 못 가서 잡기 힘들 거예요."

"우리는 공립으로 가려고 해! 서둘러 갈 거야. 그렇지? 로만손!"


로만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란은 언제나처럼 나랑은 말도 잘 안 하고 곁에 있기만 했다. 등산화를 신고 끈을 조절하는 나를 마마드가 말없이 바라보았다. 뭔가 얘기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눈치였다. 로만손과 같은 눈빛! 어쩌면 내가 자신들을 피한다는 생각에 이유가 궁금했을 것이다. 친해지고 싶었지만, 번번이 기회를 놓친 내 마음도 모를 것이지! 오늘도 역시 내가 아무리 부지런히 걷는다 해도 그들의 공립 바라기 걸음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모처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아쉬움이 크다.


마마드는 웃음 지으며 내 등산화를 칭찬했다.

"등산화 예쁘네. 색깔이 예뻐."

"고맙습니다. 세일할 때 사서 색깔이 이것만 남았어요."

"잘했어."

마마드는 따뜻한 눈으로 관심을 가져주었다. 톰 아저씨 같았다.

"이제 그만 가죠!"

로만손이 마마드를 재촉했다. 마마드는 나를 흘깃 보며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러자 로만손이 그러지 말라고 눈짓했다. 더 이상 내게 관심을 갖지 말고 빨리 가자는 뜻이다. 아란은 이미 대문 밖으로 나갔다. 슬펐다. 로만손은 내가 느려서 나를 떨구고 싶었나 보다. 공립을 잡기 위해 빨리 가야겠지. 나 때문에 발목 잡힐까 봐 그런 것인가. 마음 같아서는 서둘러 그들을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주춤했다. 그들에게 적어도 폐는 끼치지 말아야지! 나는 화장실에 갔다가 천천히 가겠다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서둘러 대문 밖을 나섰다. 어차피 나는 숙소를 예약한 사람이니까,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P선생님이 어제 카톡을 보내왔다. 로만손 일행이랑 내가 함께 묵고 있다니, 만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예약한 숙소와 거리가 조금 있었다. 아침에 출발할 때 자신의 숙소에 들러보라더니, 새로 만난 사람과 일찍 출발한다고 알려왔다. 걸음도 느린 내가 따라갈 수 없는 거리!  P선생님도 로만손 일행도 오늘이 지나면 어쩐지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만이라도 함께 걸었던 시간이 과거로 흘러가는 것이다. 저만치 멀어져 가는 로만손 일행의 뒷모습! 짧은 인연에 대해 안녕을 고해야 했다. 수비리를 빠져나가는 길목에 이제 막 출발하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다. 상쾌한 공기, 아침이 주는 에너지가 참 좋다. 친분이 없어도 같은 목적을 가진 순례자들과 함께 길 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순례자들에게 들은 이야기>

저녁 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수비리에서 숙소를 잡지 못해 아예 택시를 타고 한 마을 더 갔다고 했다.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끊긴 걸음을 이으려고 아침에 택시로 다시 수비리로 와서 걷기 시작했단다. 굳이? 왜? 그렇게까지나? 그 의지가 대단하다고 여기면서도 어쩐지 무섭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작 4킬로 끊겼다고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순례길에서 어떤 상황이든 다 과정일 텐데, 하는 말들! 뭘 그렇게나, 싶다가도 다시 돌아온 이들의 심정도 이해는 갔다. 끊어진 발걸음을 다시 이어가겠다는 게 큰 욕심은 아닐 테다. 그것도 열정이 있어야 가능한 게 아닐까? 그저 열정의 산물로 여기면 좋을 것 같다.





말이 너무 멋지다. 피레네에서 본 귀여운 당나귀들과 달리 멋진 경호원 느낌이 나는 건 왜지? 말을 하면 그야말로 말을 할 것 같다.


얼마간 오솔길을 걷다가 보니, 익숙한 존재들이 나타났다. 미국 여성 잉카와 말들! 그녀가 말한테 말을 걸고 있었다. 역시 천진스러운 눈빛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녀는 시늉을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말과 말을 하고 있었다. 역시 나랑 닮은 점이 있었다. 요새 들은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한 남자가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했다. 자신이 동물과 사물에게 말을 걸고 있어서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자, 의사가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있었다. “그 동물과 사물이 당신에게 대답을 할 때는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 말에 한참 웃었는데! 그런 면에서 잉카가 말들에게 말을 거는 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 말들이 대답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동화처럼 사는 사람들에게는 흔히 벌어지는 일이니! 어차피 삶은 판타지! 동화 속 인물들처럼 말과 대화해도 괜찮다. 말은 이미 표정으로 진작부터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으니!


동물들이 사람들에게 대화하는 방식을 아는 사람들은 소통이 뭔지 알 것이다. 사실 동물들도 재미있으면 웃고, 잘못하면 눈도 깔고 그러지 않는가? 낙타가 질겅거리며 히죽 웃는 얼굴도 나는 봤다. 말이 사람을 놀리고, 소가 헤벌쭉 웃으며 장난치는 것도 흔한 일이다.  슬플 때 곁에서 글썽글썽 위로의 눈으로 주인을 바라보는 개들을 우린 알고 있지 않은가. 고양이들이 아무리 시니컬해도 주인장의 감정 변화를 지켜보며 눈빛으로 이야기를 건네는 것도 우린 기억한다. 한참 동안 말과 대화를 나는 잉카와 나는 기념으로 사진도 찍었다. 잉카도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단번에 우리는 어제저녁 식사 때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며 친해졌다. 나보다 몸집이 큰 잉카는 무릎 때문에 천천히 걸어야 한다고 했다. 내게 먼저 가라고 하는 그녀를 이해했다. 느리게 걷는 사람들의 마음을 내가 모르지 않지! 나는 그녀를 응원하며 그녀보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 길을 지나왔다.  


철조망을 앞두고 포로 교환 협상이라도 벌이는 듯 말의 눈빛은 진지했다.





작은 마을이다. 예쁜 마을 전경에  청년의 모습도 담겼다.  확대해도 잘 보이지 않지만 모자이크로 처리했다.

 

llarratz라는 작은 마을을 지날 때였다. 어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던 한국인 부자를 다시 만났다. 식수대와 가까운 곳에 앉아 있길래 물 마시고 쉬나 보다 했다. 나도 물을 받고, 고양이랑 조금 놀다가 일어섰다. 그런데 아들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있었다. 반면 아버지는 아까부터 혼자 분주했다. 아들이 통증 때문에 더는 못 걸을 것 같아서 택시를 불러야 한다는 것! 내게 택시 부르는 법을 아냐고 묻는데, 당연히 모르지! 그의 아버지는 내게 그냥 신경 쓰지 말고 가던 길 가란다, 아들이 아파서인지 조금 까칠 버전이다. 모든 것을 자신이 다 짊어지겠다는 듯! 아마도 타인의 순례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 그는 홀로 마을 여기저기를 오갔다. 내가 별 도움은 될 수 없어도 마을 사람들에게 방법은 알아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신세 진다는 생각에 그마저 거부하는 듯했다.


어쩔 수 없었다. 억지로 돕겠다고 우기는 것도 웃긴 일이다. 나는 뻘쭘한 표정으로 잘 해결하시라며 가던 길을 가기로 했다. 상대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모습, 어쩐지 익숙하다. 내 모습! 상대가 어떠한 대가를 바라지 않아도 도움을 부담스러워했다. 때때로 도움을 거절하는 게 호의를 무시한 일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니, 그들의 심정이 헤아려졌다. 이렇게 또 배우게 된다.  


물을 마실 수 있는 식수대가 있다. 고양이들과 잠시 놀며 쉴 수 있는 곳!  순례자를 위해 마을 사람들이 잘 관리하고 있다.




조금 걸어가는데, 길 중간에 순례자 서너 명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뭔가 싶어 물어봤더니, 스탬프를 찍으려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 오래된 성당처럼 보이는 곳인데, 옆에 무덤도 서너 개 있었다. 출입구 한쪽 구석에서 신부님이 스탬프 찍는 박스를 가리켰다. 성당도 들어가라며 문을 열어줬다. 순례자들은 행운을 얻은 표정으로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가 무척 어두웠다. 벽화도 벗겨져 있었다. 의미가 큰 성당 같아서 일단 사진을 찍어두었다. 벽화 사진은 함부로 찍을 수 없는 경우들이 있기에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묻자, 괜찮단다.


Eskirotz & Ilarratz의 수도원, 개방시간은 정확히 모른다. 지나는 길에 내부를 보게 된 건 행운이었다.


<Eskirotz & Ilarratz의 수도원>  

이곳은 한 순례자가 교구로부터 어렵사리 건물을 구매 이후 복원 과정에서 독특한 형태가 발견되었다. 제단 뒤 벽화에 기독교 이전의 이교도 상징인 별과 영혼에 관한 흔적이 나타났다. 12세기 산티아고로 가는 템플 기사단을 보호하기 위한 요새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 경로를 따라 크고 작은 성과 요새들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13세기부터 수도원으로 개조되었지만, 16세기에 제단이 버려졌다. 현재는 순례자들을 위한 안식처로 준비 중이라는데, 주변에 아무 건축물들이 없는 걸로 봐서 오랜 세월 많은 부침의 역사가 있지 않았나 싶다.


Eskirotz & Ilarratz의 수도원 내부


Eskirotz & Ilarratz의 수도원 내부


밖으로 나와서 스탬프를 찍기 위해 보조가방을 열었다. 그런데, 왜 없지? 분명 로만손이 도장을 찍어주고, 식당에 가서 잠깐 커피 한 잔을 마신 것 같은데? 보조가방에 챙겨 넣은 기억까지는 안 나네? 나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서 본격적으로 짐을 막 뒤지기 시작했다. 보조가방에 항상 넣고 다녔는데 없고! 작은 배낭도 찾아봤지만 없다. 오는 동안 꺼내본 일도 없었는데? 아까 숙소에서 도장을 찍고? 설마 가기에 두고 왔단 말인가? 어쩌지? 돈도 아니고 귀중품도 아니지만, 생장에서부터 지금껏 걸어온 흔적인데, 돌아가서 찾아봐야 하는 건가? 여기까지 어떻게 걸어왔는데 돌아간단 말인가! 에휴! 내 초반 순례 역사 한 부분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했다


혹시 모르니, 숙소에 전화나 한 번 걸어보자 싶었다. 있다면 택배로 받는 방법 같은 게 있으려나! 전화를 걸었지만 안 받는다. 다시 걸었다. 안 받는다. 또 걸었다. 오! 이번에는 받았다. 그녀는 아직 출근 전이라고 했다. 숙소에 가면 확인하고 연락 준단다. 확실히 가게에 있다는 확신도 없었다. 오다가 떨어뜨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간에 보조 가방을 열어본 적은 없다. 아무래도 숙소가 유력한 후보지다.


문득 단체 카톡이 생각났다. 같은 시기에 입성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단톡! 아직 살아있다. 나는 혹시 몰라 메시지를 남겼다. 혹시 수비리에 거하시거나 오늘 수비리로 들어가시는 분 있는지 물었다. 한두 사람이 대답했다. 내 사정을 얘기하자, 숙소 이름을 알려달란다. 숙소 이름? 아, 왜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지? 일단 숙소 이름을 찾아봐야지 싶을 때였다. 성당 문을 열어줬던 신부님이 나를 유심히 보더니, 미심쩍은 눈으로 가방을 더 찾아보라고 한다. 왜 그러실까? 여태 내가 찾아본 걸 곁에서 지켜봐 놓고!

"없어요. 아무리 찾아봐도!"

나는 개털이라도 된 듯 보조가방과 내 작은 배낭을 열어 보이며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신부님이 무표정하게 스탬프 찍는 박스로 가더니, 열쇠로 문을 열고 뭔가를 꺼내더니 내게 건넨다.

“이걸로 찍어!”

"네? 이게 뭔데요?"

"순례자 여권이야. 우리도 준비해둔 게 있지! 가져!"

나는 일단 감사하게 받았다. 그런데 별 감흥이 없었다. 이건 그냥 동네 짜장면 집에서 나눠주는 쿠폰 판처럼 빈칸이 들어있고, 성당을 광고하는 전단지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무식하니까 귀한 것도 모르는 것이다.


중요한 건 내 처음 발자취가 담긴 게 없어졌다는 건데, 중간에 새 순례자 여권에 도장 찍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처음부터 내 발자국이 찍힌 내 순례자 여권을 다시 찾고 싶었다. 기대와 달리 풀 죽어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신부님이 눈을 껌뻑였다. 일단 숙소 주인장에게 전화가 오길, 그것을 찾으러 누군가 가주길! 그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기에 다시 숙소 이름을 찾아야지 싶을 때였다.


길 가 저 끝에서 독일인 부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나보다 더 늦게 식당에 와서 뒤적거렸지! 아들은 수줍게 미소로 눈인사를 건넸다. 아버지와 함께 순례길도 걷고, 교육을 잘 받은 친구 같았다. 나도 부저에게 인사를 건네며 혹시 하는 마음에 물었다. 설마 그들이 알겠냐 싶으면서! 아버지에게 그냥 던진 말이다.

“혹시 식당에서 순례자 여권 못 봤어요? 내가 도장을 찍고 나서 어디에 뒀는지 가방에 없네요.”

설마 못 봤겠지만, 혹시 봤다면 수비리에 들리는 한국인들에게 건네 지길 바라는 마음에! 제발 그가 봤다고 말해주길 바라면서! 그러자 독일인 아들은 뒤로 빠지며 경청 모드! 아버지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앗! 내가 제대로 본 건가? 혹시 내 얘기를 잘못 알아들었나? 부정문, 긍정문? 내가 맞게 말했나? 부정문이면 대답은 반대니까, 그러니까, 뭐라는 거야? 못 봤다는 거지? 아닌데? 그리고 들리는 대답이 내 귀를 시원하게 해 줬다.

“봤어요.”

"뭐라고요? 순례자 여권을 봤다고요?"

"네, 식당 테이블에 있던데요? 당신의 순례자 여권!"

나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그저 인사처럼 툭 던진 말이었는데, 그렇게 덤덤하게 희소식을 알려주다니!

"아, 정말요. 와우! 지금 식당 테이블에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은 없어요."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린가. 그럼 아까 봤는데, 지금은 누군가 가져갔거나, 버려졌다는 말인가?

"왜 없어요?"

이게 무슨 질문인지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의 심각함과 달리 그가 싱긋 웃는다.

"내가 당신 배낭에 넣었으니까!”

“네? 뭐라고요?”

귀로 들리는 소리가 해석이 안 되고 있었다. 내가 뭔가를 잘못 들은 게 분명했다.

“내 배낭에 넣었다니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제 배낭이라니요?"

"당신 배낭이요!"

"제 배낭?"

나는 내 등에 메고 있는 배낭을 들여다봤다. 독일인 아버지와 아들이 피식 웃었다.

"숙소에 당신 큰 배낭 있던데요? 당신 이름 있나 봤더니 있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 넣었어요.”

머리가 쪼개질 듯 섬찟한 기쁨을 아는가! 식스센스 보다 반전이었다. 이 사람은 나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무관심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내 배낭을 찾아서 내 순례자 여권을 집어넣어주는 센스를 발휘했다고? 그런 자상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멈칫했다.

“아!"

외마디 탄식 후 입을 연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머나, 세상에! 고마워서 어쩌죠. 정말 고마워요!”


그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동키를 보내기 위해 세워둔 배낭들을 뒤져서 내 순례자 여권과 같은 이름을 대조하며 찾은 것이다. 가고자 하는 지역과 숙소명, 내 이름을 적고 돈을 넣어둔 봉투! 어쩔 때는 동키가 일정한 루트대로 움직여서 이름과 지역을 건너뛰고 숙소명만 적어도 된다고 하던데! 이때는 이름을 꾸역꾸역 잘 적은 보람이 있었다. 길이 평이하다길래 동키를 보낼지 말지 고민한 순간도 있었는데, 로만손이 발이 아플 때는 무리하지 말라며 자신들도 보낸다길래 나도 보낸 것인데! 근데 내가 동키를 보내는 것을 독일인 부자는 알지도 못했다. 서로 보이는 곳이 아니었으니! 그도 혹시 마음에 찾아봤으리라. 다행스럽게도 그곳에 내 배낭에 있었던 것!


그가 이렇게 배려를 잘하는 사람이었다니, 감동이었다. 성격도 독일인 특유의 장난기 쏙 빠진 그대로여서 이런 일을 하고도 나를 보면서 얘기도 안 하고 갈 판이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 같았으면 이미 저 몇 미터 전부터 반갑게 손을 흔들고 난리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네 배낭에 여권을 넣었다!” 며 오두방정을 떨며 함께 기뻐했을지 모른다. 독일인 부자는 나를 보고도 무심히 인사만 건네고 지나치려고 했다. 내가 묻지 않았으면 말도 안 해줬을 것 같은 분위기! 아마 걸어오면서 이미 기억에서 지워졌을지도! 독일인 아들은 나를 보자 시익 웃었던 게, 아마 그 생각이 떠올라서였나 본데, 그도 점잖게 서있기만 했다.  


성당 앞에 함께 서있던 사람들이 모두 기뻐해 줬다. 행운이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주기도 했다. 독일인 부자는 다시 무심히 걷기 시작했다. 초라해 보이는 성당도 그냥 지나쳐 터벅터벅 사라지는 뒷모습!  왠지 멋진데? 천사가 마냥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눈빛만 가진 건 아니군!


나는 곧바로 단체 카톡방에 글을 올렸다. “방금 천사를 만났어요. 독일인이 제 순례자 여권을 숙소에서 주워 제 동키 배낭에 넣었다고 하네요!”

그곳에서도 함께 기뻐해 줬다. 까미노 길 위에서 천사를 만난다고 하더니, 정말 만났다며 축하해줬다. 나는 그야말로 피레네 로만손 일행부터 해서 계속 천사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숙소 주인장에게도 전화를 걸어서 이런 사실을 얘기해줬다. 그녀는 이제 막 숙소에 도착했다고 한다. 동키는 이미 출발해서 자신은 확인할 수 없단다. 어쨌든 그녀도 기뻐해 줬다. 그러고 보니, 동키가 출발하고 난 뒤 그가 내 순례자 여권을 발견했다면 그런 친절도 못 베풀었겠구나 싶었다. 이 모든 게 잘 맞아줘서 감사한 날이었다.


그때, 신부님이 슬쩍 다가오더니 잘 됐다는 미소를 날렸다.

“그럼 그거 다시 돌려줄래? 원래 2유로씩 파는 건데, 그냥 준 거였어. 찾았으니까, 돌려주라!”

줬다 뺏기 있기 없기? 낙장불입 모르시나요? 신부님? 아 근데 이게 파는 거였구나. 하지만 나는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신부님에게 진심 어린 눈으로 물어봤다.

“신부님, 저에게 주신 이 순례자 여권을 가지고 순례길을 가면 안 될까요? 그냥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요.”

신부님이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홀리듯 순례자 여권을 내민 자신을 자책하진 않으시겠지? 사실 도장을 찍으며 기부함에 동전을 넣어야지 싶었다. 그런데 신부님이 벌써 성당 문을 닫고, 박스도 다 정리했다. 나랑 같이 있던 순례자들도 사라졌다. 잠깐 동안 문을 열어준 것이다.


나는 일단 2유로는 내야지 싶었다. 그런데 신부님이 괜찮다고 했다. 이제는 끝났어. 다른 사람한테 베풀라는 미소? 그런 눈웃음이었다. 내가 왜 2유로를 기부하지 않았나 나중에 후회가 됐다. 그 초라한 성당에 사람들도 많이 없는 길에서 그냥 기부도 아니고, 순례자 여권을 구입한 돈을 지불했어야 했는데! 기쁨에 취해 욕심을 부린 것이다. 선물 달라고 징징거리는 철없는 인간이 나다. 신부님은 애초에 내게 2유로를 말하지도 않았지만, 나중에 하나를 잡기 위해 하나를 버리라는 뜻으로 새 순례자 여권을 돌려달라고 말한 것이겠지. 성당 문을 닫고 정리하고 나오는 신부님에게 말했다.

"끝으로 사진이라도!"

떼끼! 너무 날로 먹는다,라고 혼이 나도 대여섯 번은 났어야 했는데, 신부님은 한껏 웃었다.

"좋지요. 사진 찍는 거, 좋아요!"

둘이 머리를 내밀고 성당을 배경으로 한 컷 찍었다. 그리고 그도, 나도, 그 자리를 떠나왔다.


하느님! 저에게 보내주신
천사 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저도 천사 역할을 하며
이 순례길을 걸어 가게 해주세요.
이번에 제 욕심이 과했어도
조금만 봐주세요.
이 선물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요.
그러니,
혼내지 말기!  


Eskirotz & Ilarratz의 수도원




하늘이 파랗다. 날이 참 좋았다. 이제야 비로소 걷는 데 익숙해져 간다. 힘들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익숙해지는 것이다. 오늘 길은 평이하다고 했다. 하루 20킬로 남짓 거리는 이제 익숙해져야 할 거리다. 하늘이 맑다 싶어 사진을 찍다 보니, 십자 모양으로 구름 길이 나있다. 캠트레일이라! 음모론 중 하나가 바로 저 하늘 위에 뿌려대는 캠트레일이다. 스페인도 예외가 아닌가? 모양이 너무 티 나게 십자 모양이다. 일루미나티가 인구수를 줄이기 위해 하늘에 독성 물질을 뿌린다더니!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여길 수 있지만 가끔 궁금하긴 했다. 왜 하늘 길을  줄기차게 누비며 뭔가를 하는 것일까? 비행기가 지나가고 남는 꼬리, 비행운은 아니 듯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음모론은 세상의 중심에서 내가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슈퍼우먼 의식을 심어준다. 지구를 구한다던 독수리 오 형제는 노령이 되었을 거고, 우리의 오랜 히어로들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느라 바쁠 듯했다. 뭐가 됐든 발바닥 아픈 건 누가 해결 못 해주겠지? 히어로도 늙고 나도 늙는다. 가자 가자! 일단 하늘 길 말고, 땅 길이나 잘 다녀보자!   



하늘이 너무 대놓고 십자가다. 수직으로 올라가는 비행기도 있나?  넋 놓고 하늘만 보고 있을 수 없다. 서둘러 가자!


빰쁠로나 가까운 곳에서도 이 십자 하늘을 볼 수 있다. 하늘을 보고 성스럽게 여길 수도 있고, 음모론을 떠올릴 수도 있고!




태양을 피하는 방법은?
태양을 피해서 숨어야지!


느릿느릿 걸으며 한참 동안 길에서 쉬었다. 오후가 되면서 태양이 너무 뜨거워 지쳤다. 점심도 먹고 화장실도 갈 겸, 숲길 끝, 시냇물 다리 건너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기 위해 둘러봤다. 커피와 빵, 오믈렛으로 허기를 달랜 순례자들이 마당은 물론 안쪽 테이블까지 꽉 차있다. 늦게 도착한 순례자들이 자리에 앉지 못하자, 식사를 마친 순례자들이 주변을 돌아보더니, 일어날 준비를 했다. 안쪽 바로 들어가서 주문하려는데, 테이블에 많이 본 사람이 있었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인은 바로 잉카였다. 놀라웠다. 내가 정말 오래 쉬었구나! 근데, 중간에 그녀가 지나치는 걸 못 봤는데? 또 다른 길이 있었나? 어쨌든 반갑게 인사하며 그녀의 테이블에 합석했다. 그들은 이미 식사를 끝내고 남은 수다를 떨고 있는 중이었다. 미국에서 왔다는 남자들은 한 사람은 중국계이고 한 사람은 남미 쪽 사람 같았다. 그들의 짐에 낭만을 엿볼 수 있는 우쿨렐레가 있었다. 중국계 남자는 조금 시니컬한 편이었다. 같은 동양인이지만 난 너랑 다르다는 눈빛! 동양계 동질감보다는 같은 부류로 섞이고 싶지 않은 듯했다.


잉카는 어쩐지 남미 원주민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미국 영화에서 볼 법한 캐릭터! 퉁퉁하고 서글서글한 중년 여인이었다. 주문한 내 음식이 나오자 남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잉카는 남아서 나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시 재정비를 하기 위해 화장실도 다녀오고 어쩌고 하더니, 먼저 움직이겠다고 했다.

“수, 나는 오늘 빰쁠로나까지 못 가! 중간 마을에서 잘 거야. 무리해서 걸으면 안 될 것 같거든! 연락처 주고받았으니까 나중에 만나!”

“그래, 햇살이 너무 따갑다. 조심해서 천천히 가. 나도 곧 갈 거야. 어디서든 또 만나자.”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바 안에 있는 테이블은 텅 비었다. 바깥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나 혼자 너무 늦게 점심 식사를 하는 중이네! 나도 얼른 먹고 서둘러 가야지!


숲길에서 이런 물이 흐르는 물을 만나는 건 반가운 일이다.


숲길 끝에 나온 카페!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감자와 달걀의 만남, 감자 오믈렛인 또르띠야!  빵과 커피를 아침에 주로 먹고, 점심에는 샌드위치나  또르띠야에 커피와 주스 정도를 먹는다.




목동 청년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본다.


식당 위쪽으로 길로 들어서자 도로가 나타났다. 트럭들이 쌩쌩 지나다니는 큰 도로였지만, 건너편 푸른 언덕에는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 떼들이 있었다. 양치는 목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순박한 청년 정도는 되지 않을까? 확인하기에는 조금 멀다. 큰 도로 곁으로 걷다 보면 한적한 도로로 빠지는 길이 나온다. 순례자들은 숲길로 안내되는 화살표를 따라 왼쪽 도로로 들어서게 된다.  


차도 옆으로 한참 걷는 건 피곤한 일이다. 차 때문에 긴장도 되지만 무엇보다, 귀가 시끄럽다. 공기도 차도보다는 안 좋을 것이고, 아스팔트 길은 흙길보다 충격 완화도 덜 될 것이다. 한가한 길에서 익숙하게 걷던 순례자들이 차도에 노출될 때는 어수선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큰 도로 위를 육교로 건너가거나 도로 곁을 지나갈 때 혼이 날아갈 정도로 아찔해진다. 그나마 여긴 좁은 도로라서 차가 드물게 지나다니고, 속도도 느슨하다. 한산한 숲길로 들어서기 전 더 한산한 도로만 지나면 된다.


목동 청년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다. 오랜 시간 양 떼를 돌보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빨간 팬츠는
누구인가


도로 끝에 큰 나무가 있었다. 왼쪽으로 꺾여서 계속 이어지는 도로에서 순례자는 그대로 쭉 직진해 숲길로 들어서야 한다. 나는 잠시 멈춰 물도 마시고 배낭에서 휴대폰 배터리도 꺼냈다. 그때였다. 한 남자가 내가 들어갈 숲길에서 나왔다. 빨간 핫팬츠에 민소매 차림, 20대 정도의 날렵해 보이는 체구? 등에는 가벼운 배낭도 멨다. 순례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벼운 차림이었다. 방향도 역 방향! 배낭이야 나처럼 동키를 보냈을 수 있지만 순례자들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너무 귀찮아서 물병과 귀중품만 넣고 쿨하게 다니는 건가? 그는 왜 돌아오는 중일까? 혹시 점심을 먹은 식당에 뭔가를 두고 왔나? 다시 가려면 이 땡볕에 고생 좀 하겠다 싶었다. 그나마 멀리 떠나온 건 아니니 다행이지 뭐! 순례자 여권 찾으러 갈 걸 엄두도 못 냈던 나, 이제 남일이지 뭐! 그때 그가 활짝 웃으며 '부엔 까미노' 인사를 건넸다. 이 와중에 참 밝은 웃음을 지녔다 싶었다. 근데 긍정적이라고 하기에 조 생뚱맞아 보이긴 했다. 그런데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내 앞에 서서 웃고 있다. 뭐지? 이 한가로운 태도? 그는 내게 어디에서 왔냐, 이름은 뭐냐, 어디로 가는 중이냐 계속 질문을 했다. 그리고 안 가고 서있다. 숲길에서 땡볕으로 나가려면 준비가 필요할 수 있지! 나무 그늘 밑이니까 조금 쉬었다가 가려는 걸 수 있지! 그런데 정말 물건을 찾으러 가는 길이라면 부랴부랴 가게 되지 않나? 이렇게 노닥거릴 여유가 없을 텐데?


그는 이제 노골적으로 웃으며 내 얼굴만 바라봤다. 그렇게 반갑니? 사람 구경 못한 것처럼 쳐다보게!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가 일방적으로 계속 질문하는 게 부담스러웠기에 나도 별 관심 없이 물었다.

"어느 나라 사람?"

"스페인!"

"순례길 걷는 거?"

"응, 여기 많이 왔다 갔다 해!"

뭔가 횡설수설하는 느낌? 이런 애들은 빨리 보내는 게 상책이다.

"길을 찾고 있어. 여기가 산티아고 가는 길 맞지?"

그는 내가 왔던 길, 즉 화살표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뭔가 수상했다. 많이 왔다 갔다 한다는 말은 뭐고? 산티아고 가는 길이라며 반대쪽을? 화살표 말고 다른 길이 있나? 혹시 숲길에서 화살표를 못 찾았나? 화살표가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않았나? 여태껏 일정한 거리에 표지석이 있었는데, 왜지?

"네가 가려는 길이 어느 쪽인지 지도를 잘 살펴봐. 화살표도 찾아보고!"

"내가 표식을 못 찾아서 이리로 온 거야."

"그럼 마을로 가봐! 이 도로 따라가면 마을 나오거든!"

내가 계속 마을로 가라고 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럴게! 즐거운 까미노 되길!"

그가 팔을 활짝 벌리며 허그를 하자길래 그냥 가볍게 등을 툭툭 치며 인사를 해주었다. 순례길에서 흔히 하는 볼 비비고 포옹하는 인사는 흔한 일이었지만 그럴까 봐 멀찍이 떨어졌다. 친해지면 격하게 반가워서, 너무 기쁠 때 얼싸안고 하는 인사까지 쉬운 건 아니다. 자기 딴에는 사람 없는 숲길에서 나와 반가웠나 싶었다. 나는 그를 빨리 보내기 위해 얼른 가라며 다시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이 빨간 팬츠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적인 느낌? 버버리 맨에게 나는 익숙한 자태랄까? 당황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이 녀석에게서 도망쳐야 했다. 녀석이 이상한 미소로 나를 본다. 금방이라도 버버리를 활짝 열어젖혀 보일 것 같은 미친 눈빛!


남자는 나를 보다가 주변도 둘러보다가 했다. 그제야 알게 됐다. 주변에 나 말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내 눈앞에 있는 한 두 채 집이 있어서 마을 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연결된 줄 알았는데, 사람 사는 집이 아니라 폐허였다. 큰 나무 주변으로 공터였다. 내가 지나왔던 작은 도로는 까마득하고, 도로에 차도 안 다녔다. 순례길 앞 뒤로 순례객들도 없었다. 지금 이 시간, 땡볕에 걷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나는 순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차라리 버버리 맨처럼 굴면 도망가면 끝이지만! 만약에 달려든다면? 가만, 그러면 어쩐다지? 나는 싱글거리며 얼굴이 벌게져서 우물쭈물하는 녀석 앞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단, 스틱 끝으로 녀석의 배를 쿡 찌르고, 주변에 돌이 있나? 음, 저건 너무 커서 안 되고, 저 정도가 좋겠군. 딱밤 때리듯이 잘 조준하면 될 것 같고! 그리고 발로 중요부위를 까고 도로로 냅다 달려간다. 아주 열심히 뛰어야 한다. 여긴 큰 도로가 아니니까, 죽어라고 뛰어서 큰 도로까지 달려야지! 제대로 까지 못하면 더 확 돌 수도 있으니, 죽어라 달려야 한다. 배낭은 큰 게 아니니까, 중요한 것도 없으니, 일단 버리고 보조가방만 메고 죽어라 도망가자! 성공해야 할 텐데! 나는 긴장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전화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그러다가 강도로 돌변해서 전화기를 가져가면? 아니 보조 가방을 낚아채면 여권은 물론 내 전 재산이 날아간다. 나는 보조가방을 단단히 쥐었다. 포옹은 어쩌면 보조가방을 노린 행위일 수도 있다. 강도로 돌변할 여지도 충분히 고려해야 했다. 나는 그와 신경전을 벌였다. 내가 인사를 하고 먼저 숲길로 들어서기를 그는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일부러 배낭을 내려놓고 물을 다시 꺼내서 마시고, 비옷도 꺼냈다, 넣었다가 뭉그적거리며 그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그는 안 떠나고, 약간 붉어진 얼굴로 서있었다. 내 촉은 저 얼굴이 강도의 긴장한 얼굴인가, 버버리 맨의 흥분한 얼굴인가를 판단하고 있었다. 일촉즉발! 달라이 라마의 법문을 들었을 때 기억에 남았던 말이 있다. 방 안에서 뱀과 대치했을 때처럼 깨어있으라는 말! 나는 아마도 그런 상태로 그와 마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구원 같은 빛 두 줄기가 쏟아졌다.


저 멀리 차도 안 다니던 도로에 두 사람의 순례자가 들어섰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도로 위, 작열하는 태양을 짊어진 채 멀리 걸어오고 있는 두 사람! 나이가 지긋한 남녀 커플이었다. 살았구나! 살았어! 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제 여유가 생겼다. 그는 내게 어서 숲길로 먼저 가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가 먼저 가! 나, 지금 친구들 기다리고 있어!”

그러자 그가 길 끝쪽을 바라본다. 저 멀리 걸어오는 노인들이 나의 친구일 리 없다는 눈빛! 그들이 여길 그냥 지나치면 언제든 내 뒤를 쫓아올 기세였다. 나는 그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멀리 걸어오는 노인 커플에게 손을 흔들며 어서 오라고 소리쳤다. 물론 그들이 멀리 있어서 내가 누구한테 손을 흔드는지, 무슨 소리를 지르는지 잘 들리지 않을 지점이었다. 그저 더워서 땅만 보고 걷는 중인데, 이 상황에 관심을 기울일 처지도 아니었다. 나의 적극적인 액션에 녀석이 한 발 물러섰다. 뭔가 아쉬운 표정이었다. 나는 남녀 커플에게 흔들던 손 그대로 빨간 팬츠 얼굴에 대고 흔들었다. 더 세차게!

“잘 가라! 어서 가!”

다행히 그가 나무 아래에서 천천히 심호흡을 하더니, 그 길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 점점 다가오는 노인 커플과 스친다. 그리고 내 눈 앞에 기진맥진 태양과 싸우며 걸어온 노인 커플이 섰다.


나는 나무 그늘에 서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고맙다고 했다. 그들은 더운데, 이건 뭔고? 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감사해요. 지금 지나친 저 남자가 좀 이상했어요. 위험한 느낌이 들었는데, 당신들이 마침 나타나 줬어요. 제가 당신들을 친구라고 둘러댔어요. 그랬더니, 가네요.”

그들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숨을 고르며 생수를 꺼내 마시며 웃었다.

“지혜롭네요. 까미노에서 혼자 걸어갈 때 조심해야 해요. 일행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많이 다닐 때 같이 가는 게 좋아요.”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내가 아침에 사람들이 나가는 시간에 나서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아니, 남보다 조금 일찍 나서야 그나마 따라갈 수 있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남자보다 여자분이 더 염려하는 눈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빨간 팬츠는 이 구역의 유명 인사였다. 단체 카톡에도 이미 이 구간을 지날 때 이상한 빨간 바지 얘기가 나왔다. 정말 버버리 맨 급이었다. 강도는 아닌 듯했는데, 그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단체 카톡에 그의 출현을 알리는 문자들! 사람 눈은 다 똑같다. 그는 위협적인 인물이 아니라 혼자 흥분하는 스타일로 파악했다. 아직까지 큰 문제를 일으킨 수준은 아닌 듯했다. 그저 여자랍시고, 좀 안아보고 스킨십 좀 해보려는 시도, 그 이상은 없었나 보다. 물론 이 스킨십이 가벼운 얘기는 아닌데 말이다. 포옹과 볼 뽀뽀가 인사로 여겨지는 나라에서 범죄로 규정지어질 요소는 무엇인지 모른다. 성추행도 본인이 그런 의도가 없었다 한들 상대가 그걸 불쾌하게 여긴다면 범죄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맥락들이 이곳에도 있지 않을까? 순례길에서 가끔 제보가 들어온다. 서양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동양권 늙은 남자 중에 인사를 하며 느끼는 것 같다는 제보! 뭐가 진실인지 모르겠지만, 인사를 빌미로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자, 언제가 크게 당할 수 있으니, 제발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가벼운 인사는 가벼운 인사로 끝내자.  



순례길은 대부분 안전하다.  사람이 없는 시간대에 홀로 숲길을 걸을 때, 조금 기다렸다가 다른 순례자와 동행하면 좋다.




잉카가 보낸 메시지


한참 숲길로 가다가 마을에 들어섰을 때였다. 작고 조용한 마을이라서 참 좋았다. 잠깐 양말을 벗고 쉬다가 갈까 할 때였다. 잉카가 골목을 배회 하난 포즈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 잉카!”

“수! 너 내가 보낸 문자 못 봤어?”

“어?”

내가 보조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그녀가 내 후대폰을 살폈다. 자기가 보낸 문자를 확인하느라 왓츠앱을 찾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동으로 놔서 몰랐구나!”

난 그제야 그녀가 보낸 문자를 봤다.

[수, 조심해! 길 중간에 빨간 팬츠 입은 녀석이 있어. 그가 말을 걸어도 절대 어떤 말도 하지 마. 아마 너도 알게 될 거야!]

“하하하. 잉카! 이미 알아버렸어. 이상한 놈이었어. 허그하면서 야릇하게 굴었어.”

“그래, 나한테도 자꾸 스킨십하려고 해서 그냥 빨리 걸어왔어.”

“잘했어. 이상한 놈이네. 지나가는 여자마다 다 안고 싶어서 난리였나 봐, 야한 개 같은 놈이네.”

 

잉카에게 이런 정이 있었구나. 나는 그런 생각도 못했다. 앞서 걸어갔어도 그녀까지 챙기지 못했을 것이다. 잉카는 내가 무사히 자신 앞에 나타난 게 기쁜 듯했다. 별로 유난을 떨지 않아도 그녀는 나를 친구로 여기고 있었다. 내게 문자까지 보냈는데,  읽지 않아서 살짝 염려했던 것 같다. 숙소를 찾느라 마을 입구에서 헤매고 있었나 싶었는데, 그녀는 골목 끝에서 나를 발견하고 나서 안심한 표정으로 숙소는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내가 왜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대답 없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건 트로트 버전인데, 험험! 어쨌든 마을이 응달이어서 그나마 시원한 골목이다. 의자들이 군데군데 놓여있어서 쉬다가 가도 좋을 법했다. 잉카는 가방을 멘 채 자신은 그 마을에서 자고 간다며 고민 없이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나를 염려했던 듯 서성였던 그녀! 나를 보자마자 자신의 메시지를 왜 확인 안 했냐며 내 휴대폰부터 확인했던 그녀!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운 그녀! 잉카!


작은 마을의 낡은 건물 앞에도 순레자들을 위한 의자가 놓여있다.


문 앞과 창문에 화단을 놓아두는 집들이 많다. 지나가는 동안에도 행복을 느끼는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더 행복하겠지?





누군가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


빰쁠로나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태양이 뜨거운 오후! 큰 도로 옆으로 한적한 길이 나왔다. 오르막, 머리에 두건을 쓰고 정신없이 오르다가 보니 노란 화살표가 안 보인다. 어? 여기가 어디지? 분명 길은 하나밖에 없었는데? 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야 했다. 이런! 언제 이런 두 갈래 길이 나온 거지? 내가 오른 길이 순례길 같지 않았다. 산길로 이어진 길인 줄 알고 멍하니 걸어 올라갔는데! 그러고 보니 나처럼 이 길로 들어선 순례자들이 많았는지 바닥에 돌로 다른 쪽 방향의 길을 안내하는 표시가 있었다. 순례자들이 몇 개 안 되는 돌을 끌어와 만든 것이다. 사실 귀찮은 일이었다. 나만 알아서 찾아가면 그만일 수 있는 길을 다른 이들이 헤매며 고생할까 봐 흔적을 안긴 것이다. 주변에 잔돌도 거의 없는 지대! 이 돌을 주워 만들려고 아픈 발을 절며 몇 걸음 더 걸었을 테다.


더운 날, 돌을 집어서 쭈그려 앉아 표시를 만들었을 것이다. 일정하지 않은 크기의 돌로 화살표 머리를 만들고, 몸통은 그 마저 없어서 막대기를 끌어와 만들었다. 비로소 까미노는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나는 홀린 듯 올라갔던 길에서 다시 내려와 순례자들이 만든 임시 화살표를 따라 바른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간 걷다가 평지에 있는 나무 그늘 아래에 털썩 주저 않았다. 그리고 양말을 벗고 말리는 일을 해주었다. 큰 도로 저 너머로 빰쁠로나 도시가 보였다. 그 규모가 여태껏 지나온 마을 규모와 달랐다. 예쁜 갈색 지약이지만 복잡한 도시였다. 저렇게 눈에 보인다고 해도, 걸어서 두 시간은 더 가야 한다. 문명의 이기로 익숙해진 몸은 차로 달리면 얼마 안 될 거리를 왜 굳이 두 다리로 걸어서 가는 거냐고 묻는다. 그러게! 나는 왜 이 길을 걷고 있지? 왜 이러고 있을까?   


이마저도 못 보고 지나칠 수 있지만 순례자들의 마음으로 만들어진 임시 화살표!



저 멀리 대도시 빰블로나가 보이는데, 걸어가자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코드가 안 맞아도
함께 걸을 수 있다.


안이라는 여인! 피레네를 넘을 때 그녀가 짐을 꾸리는 줄도 모르고,  내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었지! 어제는 발이라는 친구랑 동행하더니,  오늘은 론세스바예스에서 메디와 저녁 식사할 때 한국 남자랑 같이 있던 호주 여성이랑 있었다. 오다가다 서로 동행이 바뀌는 일은 흔한 일! 그저, 내가 다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재미있었다. 그만큼 피레네에서 특히 오리손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연이 오래간다는 말이 맞나 싶었다. 그때 만난 인연들이 산티아고 끝까지 가는 경우들도 흔하니까 말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걸음에 적응이 되면 나도 그들과 발맞춰 갈 수 있을 거라고! 그랬다면, 산티아고 길 끝에서 그런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천천히 발맞춰 걸었더라면!

 

안이 나에게 물이 있냐고 물었다. 내게 물을 달라는 소린가 싶어서 내 생수통을 들어 보였다. 500미리 물통에 물이 반이 남아있었다. 날이 더워도 물을 벌컥벌컥 마셔대지 않았다. 500짜리 물병 두 병이라 아껴 마신 것도 있지만, 화장실 가는 일도 생각해야 했다. 중간에 식수를 받아서 그나마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은 빰쁠로나 갈 때까지 혹시 몰라서 남겨둔 상태!


<알아두면 좋아요>

현지 물을 마시지 않고 생수만 사 먹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출발지에서 마실 물을 다 준비해야 한다. 중간에 마을에 들어섰을 때 슈퍼를 만나는 게 쉽지 않을 때도 있다. 스페인 물이 좋다는 말은 누구나 하는 말이다. 현지인이든 순례자든 다른 나라 사람이든 누구든! 다른 나라에 가서 먹는 물은 조심하는 게 맞다. 배탈이 나면 여행을 망칠 수 있기에! 그래서 여행을 가면 대부분 생수를 사서 마신다. 하지만 스페인은 현지 물에 대한 믿음도 있었지만, 일단 물 맛도 괜찮다. 순례하는 긴 기간 동안 물을 다 사 마시려면 불편할 수 있다. 배낭 무게를 고려해서 중간에 현지 물을 떠마실 정도의 물만 챙기는 게 좋다. 자유의 길에서 물 때문에 제약받는다면? 대신 물통은 챙기는 게 좋다. 물통을 잃어버렸을 경우에 생수를 먹고 현지 물을 채워 다니면 된다. 그러다가 데카트론이 있는 대도시에 가서 물통도 사면 좋다. 싸고 튼튼한 물통이 생수병보다 편리하고 안전하니까!


내 물통을 물끄러미 보던 안이 물었다.

“물 더 필요하니? 내가 줄 수 있어!”

뜻밖이었다. 그녀 배낭에는 파이프로 연결된 물통이 있다고 했다. 그녀도 현지 물을 받아서 다니는 걸 내가 안다. 길 중간에 물을 떠서 왔다는 것도! 얼마 안 남은 빰쁠로나까지 내가 가진 물로도 가능했다. 하지만 안이 내게 호의를 베풀고자 하는 뜻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먹을 것을 줄 때조차 배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준다고 여겼다. 먹을 것을 줘도 내가 당장 먹을 게 아니면 사양해야 했다. 짐이 될 수 있으니!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줄 때도 조심스럽게 물어야 했다. 사과나 복숭아 같은 과일 한 알이 무슨 큰 무게냐 싶겠지만 그런 거 한 두 개 받아서 챙기다가 배낭이 무거워진다. 그녀는 배낭을 비우기 위해 내게 물을 주려는 게 아니었다. 물이야, 길바닥에 버리면 그만 아니겠는가. 생수도 아니고 현지 물인데! 혹시 짊어지고 온 게 억울해서? 설령 그렇더라도, 그녀가 지쳐 보이는 나를 위해 돕고 싶은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한 게 아닌가! 배낭 튜브에서 물을 따라주는 과정도 왜 그리 번거로운지! 아, 마음 불편해. 피레네에서 그녀가 짐을 꾸릴 때처럼 불편한 감정이 떠 올라오네!


나의 패턴! 나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타인에게 폐 끼칠까 봐 전전긍긍하는 면도 있다. 이미 가지고 있어도 거절 못해서 가져오는 것들도 많다. 신세를 갚으려면 뭔가 해줘야 하는 일! 그래서인지 나는 신세 지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왜 그럴까? 왜 그러고 살고 있지? 받는 것을 쉽게 생각하면 안 되나? 은혜 갚을 때 확실하게 갚으면 되는 게 아닌가! 이런 두려움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내 무의식의 두려움은 나이를 먹으면서 더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타인에게 투영하는 감정들, 왜 이런 식으로 생겨났을까? 나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나이를 먹으면서 '나 같지 않은 나'를 만나서 화들짝 놀라는 일! 내게 이런 심리가 있을 줄이야! 나한테 이런 면이 있다니! 타인을 이해하던 그 넓은 아량은 어디로 사라지고, 나를 바라보던 그 불만의 시선이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되었다. 세상이 어두운 건 내가 가진 선글라스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걸 느껴가고 있다.


발이 땀에 젖으면 물집이 생기기 쉽다. 바셀린을 바르고 테이핑을 하고, 발가락 양말을 신어도 오래 걸으면 땀이 난다. 이따금 햇빛에 말려주면 물집이 거의 잡히지 않는다.


빰쁠로나 까지 가는 길이 참 멀다. 도시에 들어선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빰쁠로나 도시가 큰 것도 있었지만, 주변 소도시들이 합쳐져서 그 규모가 더 커진 것 같다. 내 앞에 익숙한 이들이 보였다. 안과 호주 여인! 내가 뒤늦게 출발했는데, 걸음 느린 나와 만나게 되다니! 아까 호주 여인 무릎에 압박 붕대가 감겨 있더니만, 보호대로 미리 착용한 게 아니라, 무릎이 아파서였나 보다.


비야바라는 마을을 지날 때였다. 축제가 열렸는지, 공원 같은 곳에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다. 여기저기 음식을 나누며 바자회와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다. 마을 축제 속에 순례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한번 먹어보라며 빵 한 조각 건네는 사람도 없다. 이들에게 우리는 투명인간인 듯!


버스가 지나다니는 도로 옆 보도블록을 낯선 이방인의 모습으로 통과했다. 도시인데, 왜 하늘은 예쁘고, 공기까지 신선하고 좋지? 한적한 도시마을이 주는 여유로움이 또 다른 감각을 깨웠다.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 버스도 다니고 현대식 건물도 있고, 공원도 있고 집도 있고 사람도 많다면? 늘 꿈꾸던 사람답게 사는 마을이었다. 이런 곳에서 좀 쉬었다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그녀들이 보도블록에 놓인 의자에 잠시 쉬었다가 가자고 했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버스와 차들 때문에 공해가 있을 거라고 여겨졌던 도로가 청명했다. 셋이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버스가 코 앞으로 지나가고, 사람들이 북적대도 누그러진 햇살이 환히 빛나는 마을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큰 도시에 비해 그다지 차와 사람 숫자가 많지 않아서인 것 같다. 아마도 신도시로 육성되고 있는 곳 같았다. 인프라부터 확충되고 인구가 유입되는 게 아닌가 싶다. 이게 맞지! 우리나라 신도시들이 인구 유입 후 인프라를 구축하면서 겪는 교통대란과 학교 문제들과 반대인 것이다.


대도시에 들어서면 순례자들은 좀 외롭다. 일상의 숲에서 이방인임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부엔 까미노로 인사하던 사람들이 사라진다. 대도시 사람들은 순례자들에게 아예 관심조차 없다. 일 년 열두 달 성수기든 비수기든 늘 보던 순례자들이 큰 의미가 있겠는가. 특별히 감정 이입할 대상들도 아니기에!


셋이 셀카를 찍었다. 얼마나 가야 하는지, 지친 마음으로 푸념도 했다. 문득 호주 여인이 아까부터 나랑 눈을 마주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무릎이 많이 아파서인가?

“무릎 많이 아파요?"

그녀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론세스바예스 때와 달리 시무룩했다. 비단 무릎이 아파서인 것만은 아닌 듯했다. 나에 대한 불편함! 확실히 그런 느낌이            들었다. 혹시나 싶어 물었다.  

"한국 남자는 먼저 갔어요?”

그녀가 썩은 표정을 지었다. 걸음 속도가 달라서 먼저 갔을 수 있다. 그게 섭섭해서 그럴 수 있다. 나 역시 일행도 아닌 로만손에게 섭섭해하지 않았던가. 더 특별한 관계였다면 상처가 됐을 수 있었겠지! 론세스바예스에서 봤을 때, 그녀는 들떠 있었다. 연인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그 남자를 바라봤다. 혼자 헛물을 켠 대가를 치른 것인가? 애정을 가지고 있던 때 그가 떠났다면, 상실감이  컸을 수 있지! 그녀가 대답을 피하는 듯해서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그녀가 아이처럼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냥 아침에 먼저 갔어요.”

“빰쁠로나로요?”

그녀가 이번에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몰라요! 그냥 말없이 갔어요.”

아, 남자가 여자한테 말도 안 하고 그냥 갔구나! 야속한 남정네 같으니라고! 그녀가 얼마나 애틋하게 그를 바라봤는지 알기에 조금 안타까웠다. 여인의 일방적인 마음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남자도 받아주는 분위기였다. 그녀가 충분히 오해할 수 있었다. 많이 외로운 사람에게는 작은 친절이 사랑으로 바뀌기도 하니까. 그런데 그 남자한테 화 난 걸 왜 나한테 툴툴 대는 걸까? 단지 한국 사람이라서? 국적이 같아서 나 괜히 미움받는 거야? 안과 호주 여인은 나랑은 코드가 살짝 다른 것 같았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은 내게는 조금 불편했다. 발이 아파서 천천히 걸어야 하는 나처럼 그녀들도 빨리 걸을 수 없었기에 얼마간 운명 공동체처럼 그녀들과 나는 함께 걸어야 했다.


한참 가로수 길을 걷다가 기운이 빠졌다. 빰쁠로나는 신기루인가? 가도 가도 닿지 않았다. 한가한 가로수길 의자에 앉았다. 한 텀 더 가야 한다는데 좀 지쳐갔다. 20킬로 남짓인데, 오늘 길이 유난히 더 길게 느껴진다. 특별히 오르막이 있는 것도, 험한 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왤까? 길이 지루해진 건지! 느려진 시간 속을 거니는 것 같았다. 의자에 앉아서 주변을 사진 찍고 있자, 내게 힘들지도 않냐며 사진 찍을 기운이 있어서 대단하다고 한다. 나를 칭찬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비아냥 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지만, 자기들이 힘들어서 하는 얘기겠지? 한국 사람들이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는 건 세계인이 다 아는 사실! 지쳐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녀들이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 오는 동안에도 사진 찍는 걸 못 봤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서로 찍느라 기다려줄 필요가 없다. 그래서 불편하지 않다. 그리고 서로의 모습도 찍어주면서 내가 걸어온 길을 풍성하게 남길 수 있다. 저녁에 혹은 며칠 뒤 메신저로 사진들을 보내주는데, 그 모습을 보든 것만으로도 좋다.


한가한 마을 외곽도로를 걷다가 드디어 빰쁠로나로 들어가는 해자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자 큰 공원이 나왔다. 이미 평화롭다. 돌담에 배낭을 걸치고 서서 어디에서 묵을지 가이드북을 찾고 있는 그녀들!  내가 예약한 사설 숙소도 말해줬지만 좀 더 찾아보겠단다. 공립을 갈지, 광장 가까운 곳에 묵을지! 그리고 내 숙소가 그녀들의 가이드북 맨 끝에 간신이 나와있는 걸 보더니, 먼저 가라고 했다. 말은 나를 위해 주는 것 같은데, 나의 숙소는 안 갈 거라는 의사를 분명히 한 듯했다. 내가 삐끼도 아닌데, 굳이 그녀들을 데려갈 필요는 없었다. 그늘진 공원에 나도 쉬면서 한 말인데! 행여 동행하길 바라는 줄 아는 건가? 그녀들이 나를 보내고 싶어 한다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잘 안 맞는 사람들인데! 속도 때문에 한동안 같이 걸어온 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길을 건너고 나서 조금 헤맸다. 데이터 문제로 휴대폰이 가동이 안 되고 있어서 성 쪽으로 올라가는 길을 지나쳤다. 아무래도 순례자들이 보이지 않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그냥 쭉 도로를 따라가면 된다고 하다가 내가 숙소를 보여주자 이쪽이 아니란다. 그러고 보니 저 건너편으로 사람들이 건너가는 게 보인다. 순례자들 몇몇, 그녀들도 그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길 건너서 엉뚱한 쪽으로 가고 있으면 좀 불러 세워주지! 발도 아픈데 백여 미터 더 내려갔다 온 게 조금 억울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녀들을 원망하고 있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언덕을 오르지, 큰 성문이 보였다. 사람들도 많았다. 짜잔! 드디어 빰쁠로나에 도착했다. 순례자들이 많았다. 내 숙소는 성문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바로 코앞에 있다. 너무 외진 곳인가 싶었는데, 거리에 사람들이 넘쳐서 좋다. 여기부터도 순례자들이 다 장악한 것 같다. 다행이다. 유난히 힘들게 느껴진 날, 결국 빰쁠로나에 도착했다.


빰쁠로나로 가는  다리! 이곳에서 공원을 지나 성으로 올라가는 언덕에서 문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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