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대신

라이킷 1 댓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양양 Sep 25. 2016

아찔

아찔/오 은

좋아하는 단어가 사라지는 꿈을 꿨다. 잠에서 깨니 그 단어가 기억나지 않았다. 거울을 보니 할 말이 없는 표정이었다.

어느 날 우리는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다른 기분으로 듣는다. 종착역보다 늦게 도착한다. 만남은 성사되지 못한다. 선율만 흐를 뿐이다.

들고 있던 물건들을 다 쏟았다. 고체가 액체처럼 흘렀다. 책장에 붙어 있던 활자들이 구두점을 신고 달아난다. 좋아하는 단어가 증발했다.

불가능에 물을 끼얹어. 가능해질 거야. 쓸 수 있을 거야. 가능에 불을 질러. 불가능해질 거야. 대단해질 거야. 아무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야.

10년 전 오늘의 일기를 읽는다. 날씨는 맑음. 10년 후 오늘은 비가 내린다. 오늘에서야 비가 내린다. 지우개 자국을 골똘히 바라본다. 결국 선택받지 못한 말들, 마침내 사랑받지 못한 말들이 있다. 다만 흔적으로 있다.

어느 날 우리는 같은 공간 다른 시간에서 다른 음악을 같은 기분으로 듣는다. 시발역보다 일찍 출발한다. 불가능이 가능해진다. 착각이 대단해진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오늘 저녁에 무얼 먹을지 고민하는 찰나, 식당 하나가 문을 닫았다. 메뉴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배 속이 끓고 있다. 턱턱 숨이 막히고 있다. 당장, 당장.

시공간이 한 단어에 다 모였다.

좋아하는 단어가 사라지는 꿈을 꿨다. 지구처럼 생긴 플라스틱 공을 비틀어 열었더니 피슉 하고 탄산 빠지는 소리가 났다. 곧 내가 알던 내가 좋아하던 단어 하나가 증발했다. 나는 그것을 아크릴 상자 안에 넣어두고 예쁜 핀 조명을 쏘고 자주 닦고 들여다보고는 했었다. 나는 그것을 모두가 부르는 방식대로도 부르고 나만의 방식대로도 부르며 앞면 뒷면 옆면 밑면을 세심하게 쓸어보았었다. 어느 날은 그전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작은 흠집과 매력적인 무늬들을 새로 발견하기도 했었다. 그러면 좋아하는 단어가 더 좋아지곤 했었다.

잠에서 깨니 그 단어가 기억나지 않았다. 더 이상 나에게는 그것을 부를만 한 어떤 단어도 없었다. 내 장식장에는 이제 남은 것이 별로 없게 되었다. 아주 없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어젯밤에는 캄캄한 강변을 걸었다. 혹시 누군가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내가 잃어버린 단어가 튀어나올까 싶었다. 낯선 사람들은 그래서 그러니까 아니 결국은 기어코 내가 말했던 그대로 들어봐. 라고 말했다.

무성한 수풀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비릿하고 쌉싸름하면서도 시원하고 개운한 냄새. 증발해버린 내 단어에서도 이런 비슷한 냄새가 났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만져보고 싶고 코를 가까이 대 킁킁거려보고 싶은 냄새. 그런데 그 단어가 뭐였지?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유광으로 무광으로 흐르는 컴컴한 물 표면에 예쁜 색깔이 비쳤다. 훅 무섭다가 갑자기 경쾌해지는 색깔. 증발해버린 내 단어도 이런 색깔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만져보고 싶고 만졌던 손을 내 배에 문질러보고 싶은 색깔. 그런데 그 단어가 뭐였지?

좋아하는 단어가 사라지는 꿈 쯤이야 다들 한 번씩은 꾸는 꿈인데. 아차차 너는 중세 사람인 것을 잊고 있었구나. 체가 말했다. 나는 웃었다. 내가 찾는 것이 풍차일까. 내가 찾는 것이 둘시네아일까. 얼핏 맞는 소리 같았다. 그런데 액체는 액체고 고체는 고체이지 액체가 고체로 고체가 기체로? 내가 좋아하는 어젯 밤 꿈 속에서 증발해버린 그 단어는 이젠 무엇이 되었을까.

죽어버린 사람의 영혼이 지구 주변을 구름처럼 떠돈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 새벽엔 피슉, 하고 지구가 열리면서 탄산 빠지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영혼은 나무 밑둥이나 깨진 시멘트 바닥 사이에 고이기도 하고 찰랑찰랑 물 위를 둥둥 떠다니기도 한다고 믿었다. 어느 날 낯선 바람과 어느 날 낯선 볕은 그렇게 설명되는 걸 거라고.

세상에. 나는 중세 사람인 게 맞았다. 그 때 잃어버렸던 그 단어는 이젠 짝 안 맞는 젓가락처럼 대충 시금치나 잡으면 그만인 단어가 되었다. 다시 십 년 뒤 오늘이 되면 나는 같은 공간 다른 시간에서 다른 음악을 같은 기분으로 듣게 될까. 혹은 문 닫은 식당 앞에 서서 울상 짓는 메뉴를 보게 될까. 배가 끓을까. 턱턱 숨이 막힐까. 지금처럼.

말장난이 세상에서 제일 싫던 내가 있다. 그리고 하나 둘씩 좋아하는 단어를 잃고 있는 내가 있고. 말장난은 각 단어의 울타리에 조금씩 상처를 낸다. 상처난 단어의 울타리엔 무언가가 고인다. 아마도 전혀 다르다고 믿었던 다른 단어의 울타리에서 떨어져나온 조각들. 틈에 꼭 들어맞지 않기도 하고 어영부영 들어맞기도 하면서 내가 좋아하던 단어들은 약해진다. 약해지면서 커진다. 찰랑찰랑.

keyword

양양

👩‍💻

구독자 20

매거진의 이전글 돌멩이처럼 나는 매거진의 다음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