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만 남은/김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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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손은 먼저 내장을 끄집어냈다 간과 쓸개 십이지장 맹장 위장 비장 소장 대장 마지막까지 몸부림치던 심장도 눈알이 아직 남아 나는 내 뱃거죽을 들어 올리고 안쪽을 봤다 아직 할 일이 있다는 듯 텅 빈 거기가 아직 뜨겁다 하나 곧 모르는 손은 곧 내 눈알을 빼고 풍성한 머리칼로 덮인 머릿가죽을 벗겨내고 두개골을 가르고 뇌도 꺼냈다 이윽고 눈알도 우악스럽게 뽑아냈다 팔딱거리다 축 늘어진 혀도 잘라냈다 모르는 손은 내 온몸의 살가죽을 벗겨냈다 이제 내겐 안쪽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바깥이 순식간에 그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모르는 손은 내 뼈에 붙은 살점마저 깨끗이 긁어냈다 모르는 손이 모르는 제 손을 닦아냈다 나는 뼈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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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동안 그의 뼈들은 자꾸 절그럭거렸다 지독한 관절염을 앓는 부위도 있었지만 염증은 잘 보이지 않았다 구멍 숭숭 뚫린 골다공증의 뼛속으론 예측할 수 없는 한기가 자주 드나들었다 뼈만 남은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그의 몸에 자꾸 부딪쳤다 심하게 골절되는 때도 있었지만 거리에서 그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 해골을 가지고 여기서 썩 꺼져, 운전자들은 이따금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성대가 없으니 대꾸도 할 수 없어 그는 그때마다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자동차에 치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웠다 뼈들이 순식간에 흩어져버릴지도 모른다는 강박증이 그의 뼈를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었다 사막은 아니었지만 도시의 어딘가로부터 모래바람이 불어왔다 뼈는 조금씩 마모되어갔다 이 도시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겨우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뼈들의 의지가 갈수록 느슨해져만 가고, 이제 그만, 어느 시간에서건, 그는 발굴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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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죽음도 새로 이어 맞추지 못했다
밤의 모든 창문이 눈을 감는다
어떠한 감정도 발명하지 못했다
뼈만 남았다
어릴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 체가 있었다. 같이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불꽃놀이를 해도 덜렁거리고 칠칠맞은 나는 옷에 구멍을 내는데 체는 예쁘게 얌전하게 불꽃놀이를 하고 손을 탈탈 털고 집으로 돌아갔다.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보면 늘 올백을 맞거나 전 과목을 통틀어 하나를 틀렸다.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체를 칭찬했고 체의 말이라면 뭐든 다 신뢰했다.
어느 날 체가 초조하게 교실을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나 싶더니 앞 문이 빼꼼 열리면서 체의 어머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체가 잊어버린 숙제를 챙겨주러 온 거였다. 그 이후로 나는 체가 은근 허당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체는 수능 날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아 사고를 쳤고 지하철 노선을 잘못 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때마다 매번 어머니나 아버지가 차를 끌고 와 수습을 해 주었다.
체와 내가 마지막으로 만난 건 몇 년 전 월미도에서였다. 선선한가 추운가 싶은 날이었다. 간단히 차이나타운을 돌고 맛있는 짜장면도 한 그릇 먹은 뒤 해가 진 월미도를 걸었다. 그냥 엄청 넓은 강 같아. 모래사장이 없어서 그런가? 야경 때문 아닐까? 이런 시덥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체가 사귀다가 헤어졌던 애인을 다시 만날 약속을 잡았다고 했다. 만나기로 한 날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가던 중 자기가 반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음을 알게 됐단다. 서둘러서 반대쪽 승강장으로 넘어가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옛 애인에게 문자를 보내니 아 맞다, 너 그런 애였지. 하는 답장이 돌아왔다고.
강 같은 바다를 내다보면서 나긋나긋 얘기하는 체의 옆모습을 한참 쳐다보았다. 새하얀 얼굴에 쌍꺼풀 없는 눈과 특별히 다듬지 않은 눈썹 등등. 뜯어보면 이쁜 구석 하나 없어도 성격과 배경이 내려앉아 고운 얼굴. 이야기하는 입술에 뽀뽀하고 싶을 정도로
오늘 퇴근하는 길에 라일락이 핀 화단 난간에 잠깐 앉았다. 연이어 선 높은 빌딩들마다 촘촘히 불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인지, 육교 난간이 그 날 그 난간을 생각나게 했던건지 나는 월미도에서 체와 이야기를 나누던 밤을 떠올렸다.
지하철을 잘못 탄 일이 뭐가 그렇게 대수였는지, 그리고 그 일로 옛 애인과 다시 잘 해볼 일이 무산된 게 왜 그렇게 속상한 것인지 나는 솔직히 잘 이해하지 못했다. 불꽃놀이가 끝나고 깔끔하게 손을 털고 일어나듯이 일어나면 되는 일 아닌가 싶었다.
몇 년 전 난간과 몇 년 전 라일락 젖은 공기에 오늘 발 걸려 넘어진 사람처럼. 한참 한참 거기에 앉아 있었다. 나는 원채 덜렁거리고 칠칠맞아 불꽃놀이 하나 해도 옷에 구멍을 내는 사람이니까. 백치처럼 헤헤 웃고 그 김에 논두렁에 쌓아둔 볏짚이나 뛰어넘고 놀까보다, 하고. 애써서 정신머리를 수습해보려고 한다. 김근 시인이 팁을 하나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