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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Apr 21. 2016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 황인찬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했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는 인천의 어느 한 빌라촌이었다. 4,5층 되는 빌라가 언덕배기를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그 간격이 너무 좁아서 옥상에서 옆 건물 옥상쯤은 가볍게 뛰어 넘을 수 있는 정도였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내 동생이 방 문을 열고 옆 빌라의 주방 창문을 열 수 있을 정도였고.

  우리는 종종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창틀에 매달려 노래를 불렀다. 창틀에서 몰래 키우던 햄스터가 떨어져버린 시커먼 배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옆 동 같은 층 아줌마가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골목길을 자각자각 밟는 구두 굽 소리도 들렸다. 팔꿈치에 진한 창틀 자국이 남았다.

  우리는 어떤 구두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 늦게서야 들어오는 어떤 구두 소리. 지금 와서 잘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다시 듣는다면 정확히 구분해 낼 수 있는 소리다. 시멘트 언덕에 켜켜이 낀 모래와 시멘트 가루와 먼지들을 느릿느릿 꾹꾹 밟으며 내는 소리다.   


  나에게도 때 되면 꺼내 맨 손으로 쓸어보게 되는 백자가 있다.

  백자는 차다가 기울다가 밝아지고 컴컴해졌다. 백자는 그 빌라 그 집에 그대로 있다. 가구도 빠지고 사람도 빠진 텅 빈 집에. 가끔 날 좋은 날 백자는 현관을 열어놓고 설거지를 했다. 나는 방금 청소를 끝낸 마루바닥에 누워서 퐁퐁 냄새와 한낮의 볕 냄새를 맡았다. 라디오는 찬송가를 부르고 냄비는 고구마 맛탕이 익어가는 소리를 냈다. 

  마루바닥이 차갑고 딱딱해서 잠이 솔솔 왔다. 영혼이 말풍선처럼 코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르렁그르렁 하다가 팽 풀면 쏙 빠져서 혼자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백자는 폐기름을 모아 빨래비누를 만들었고 다 마신 우유곽에 신문지를 채워 내 크기에 꼭 맞는 쇼파도 만들어 주었다. 미술 숙제로 내 대신 금붕어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보다 고작 몇 살 많은 나이다.


  한 때 어른이 된다는 건 무슨무슨 대로나 터널 이름을 잘 아는 걸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택시를 타면 능숙하게 우회전, 좌회전, 끼고 돌기 등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걸 거라고. 지금 나는 아주 매끈한 자세로 한 번에 차 문을 열고 시트에 올라타지만 어른은 아닌 느낌이다. 우면산 터널로 해서 가주세요, 하고 따부러지게 말은 하지만 여전히 어른은 아닌 느낌.

  대답을 듣지 못한 질문을 가슴속에 품고 사는 일을 차다가 기울다가 밝다가 어두운 백자를 삼킨 것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깨지지 않도록 흔들리지 않는 선반 위에 잘 얹어두어야 하고 때 되면 꺼내어 먼지를 쓸어주어야 하는 일이지 않을까. 싶은거다.

  내가 삼킨 백자는 요즘에도 가아끔 고구마 맛탕을 해주고 날 좋은 날 현관 대신 베란다 창을 열어두고 설거지를 한다. 나는 예전처럼 마루바닥에 누워서 등으로 그 소리들을 듣지는 않지만. 그 대신 실비 보험 얼른 들어라, 잔소리나 한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이건? 하고 말 트인 나는 질문쟁이였다던데 이젠 질문을 안으로 삼키는 사람이 되었으니 답답하다. 그래도 내가 삼킨 내 백자에 먼지가 켜게 하지는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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