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가지 색과 온도에 대한 마음 / 백은선
초록이었을까. 그건. 눈이 내렸을까. 아니면 손과 손, 지나가는 바람 또 바람. 그런 것들뿐이었을까. 그녀에게. 알 수 없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새는 지도를 버리고 숲 쪽으로 기울어진다. 빛이 많은 악기를 조심하라고 우리는 서로의 이마에 화(華) 자를 새겨 주었다.
오늘 밤 내가 할 이야기는 나도 알지 못한다. 그녀가 그녀의 숨을 벗고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맸던 것처럼. 부숴버리고 싶은 가느다란 뼈들. 나는 나의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갈 거야. 꿈에는 매번 같은 의자에 앉아 같은 사람과 얘기 나눴다. 더 어두워진다면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을 무섭다고 하지 못하는 것.
수심은 빛을 갖는다. 새의 날개가 부러진다. 우아한 추락이구나. 붉게. 이번 사냥엔 동원될 것이 많다. 나는 네 옷섶을 풀어 최초의 발톱과 눈먼 사자의 털을 넣어준다. 그리고 상아를 깎아 만든 우윳빛 젓가락 한 벌. 빛을 통해, 빛을 통해 어두워질 것.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나요. 냄비는 뜨겁고 손과 물 혹은 손에 갇힌 손, 물에 갇힌 물. 그건 균열에 대한 이미지. 눈이 내리기 직전에는 모든 것이 자리를 바꾸지. 알 수 없는 중력, 알 수 없는 목소리. 복도를 가로지르는 칼날.
뒷모습은 증식한다. 하나둘. 그녀의 안개가 힘없이 수면을 드리웠던 것처럼. 꼼짝 말고 여기 있어. 초록일까. 몸을 관통하는 바람에 대한 얘기는 들어 본 적 없는데. 무릎을 접고 그녀는 진창으로.
그때부터 이마를 가리기 위해 머리를 길렀다. 작은 나무상자가 불에 덴 잠을 훔쳐갔기 때문에. 그녀가 새를 잡아왔기 때문에. 나는 한 가지 소리만을 움켜쥔다. 거꾸로 처박힌 이미지들. 그것에 관여하는 음은 증발하는 성질. 불의 가장자리와 동일한 손이다.
일상이 그로테스크해지는 순간이 있다. 나는 언젠가 그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다. 내 안의 시계와 내 밖의 시계가 엇맞는 순간. 혹은 내 안의 온도와 내 밖의 온도가 엇맞아 서리가 맺히는 순간. 살면서 누구에게나 꼭 한 번씩은 찾아오는 순간에 대해서.
며칠 전 저녁을 먹으러 잠깐 집에 들렀다가 화장실을 썼는데 샤워기가 바뀌어 있었다. 평소에 수도꼭지로 물을 틀면 샤워기 쪽으로도 물이 찔끔찔끔 새어 나와서 불편하던 참이었으니 엄마가 바꾸어 놓았나보다 생각했다. 새로 바뀐 샤워기는 하얀색에 버튼까지 달려있는 대중탕용이었다.
그런데 퇴근을 하고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가 씻으려고 보니 샤워기가 원래의 것으로 돌아와 있는 게 아닌가. 수도꼭지로 물을 틀면 샤워기 쪽으로도 물이 찔끔찔끔 새어 나왔다. 이상하다. 내가 잘못 봤을리는 없는데. 다른 집으로 들어갔었을리도 없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에 들어가니 또 샤워기가 바뀌어 있다. 이번엔 가오리 모양으로 옆구리가 납작하고 넓은 은색 샤워기다. 나는 샤워기를 뽑아 이리저리 만져보고 돌려보았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니가 날 갖고 장난을 치는 건 아닐거야.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란 불이 들어오고 마주 선 사람들이 하나 둘 이쪽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나도 건너려고 다리를 움직였는데 바닥이 살짝 휘청거렸다. 지진처럼 덜컹하는게 아니고 푸딩처럼 흔들거렸다. 내 운동화의 앞코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느낌. 그런데 나는 언제 걷는 법을 배웠지?
내가 걷는 법을 배우던 때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당연하다. 하지만 그래서 배운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또 했다. 걷는 법을 뛰는 법을 일어나는 법을 나는 배우지 않은 게 아닐까? 배웠다고 생각하고 믿고 사는 게 아닐까.
내가 태어나던 순간을 새카맣게 잊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한다. 마주 오던 어떤 사람과 어깨를 부딪치면, 한 잠 자고 일어나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한다. 샤워기를 자근자근 만져보았던 것처럼 내 얼굴이나 내 팔, 내 다리 등등을 자근자근 만져보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사실 굉장히 두려운 일이다. 그러다가 아주 갇혀버리고 싶진 않으니까.
신나게 이야기하다가 말고. 방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하는 사이 찾아오는 침묵. 퇴근하고 아무도 없는 길을 핸드폰을 보며 걷다가 갑자기 할 게 없어져서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까망.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말고 겪는 굴절. 무심코 옆을 돌다가 통유리로 보게 되는 내 얼굴. 이런 것들이 삶을 그로테스크하게 만든다. 나는 낯선 사람이 된다.
어느 날 마음의 준비 없이 나를 맞닥뜨리고 나서. 앗 죄송합니다. 어깨를 부딪쳤네요. 하지나 않을까. 웃긴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