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 많아진 걸까. 새 울음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횟수가 늘어났다. 눈 역시도. 새가 수평으로 날기만 하는 게 아니라, 수직으로 비상한다는 사실을 오늘 아침에도 확인했다. 책상에 앉아 있는 지금도 맞은편 창문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바닥에 떨어진 버찌를 종종 발견한다. 채 익지 않아서, 아름다운 붉은색의 버찌 위를 올려다보면서, 이 나무가 한 달 전에 환한 꽃을 선사했구나 한다. 콩과 나팔꽃 싹이 자란다. 콩은 무럭무럭, 나팔꽃은 조심조심 자란다. 옆에 치자 꽃을 심었다. 온도가 올라가면서 잎이 하나둘 떨어져서, 괜히 화분에 심었나 걱정하던 무렵 다시 흰 꽃을 보여주고 봉오리 몇 개를 단다.
캄캄한 공간에서 헤드폰을 끼고 있었다. 나 혼자였다. 빛이 없는 게 아닐 텐데, 빛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헤드폰에서 이런 말들이 들려온다. 마음과 물질이 단절되지 않았다고 칩시다 , 중력이 사라져 간다고 쳐 봅시다, 몸을 어떻게 할지 어색했다. 쪼그리고 앉았다, 서 있다, 어색한 몸과 어둠과 헤드폰의 ‘칩시다’라는 지시어가 도무지 편안하지 않다. 그러니까 마음과 물질이 단절되지 않는 건, 중력이 사라져 간다고 치는 건, 그것이 ‘치는’ 일이라도 힘들구나 한다. 옆 전시의 팻말 속 문구가 떠오른다. 버려진 종이와 고무 사이, 어디선가 이동했을 조금의 흙 위로 서 있던 식물, 뿌리가 흙을 움켜쥐고 있으면 서 있을 수 있구나, 저 서 있음은 언제까지 가능할까라고 잠시 심란했었다. 그 나무와 헌 옷과 버려진 티브이 사이에 존재했던 문구다. 'I COULD BE AS SOFT AS YOUR BRAIN' ‘우린 당신이 우리를 읽는 것보다 더 빨리 당신에게 더 닿길 원해요.’ 그 우리들은 사람도 동물도 아니다. 무생물, 혹은 아슬아슬한 식물이었다. 불가능의 세계이나 가능을 시도하는, 가능을 시도하나 불가능한 세계를 알려주는 일은 예술이 인간에게 주는 큰 힘 중 하나다.
돈과 건강과 시간에 관해서라면 포기하는 중이다. 백 프로 포기는 있을 수 없고, 이제 절반은 넘은 것 같다. 내 나이만큼 포기하는 것 같다. 53% 포기, 내년에는 54%, 언젠가는 60%와 70%와 80%. 90%를 넘길 수 있을까? 어쩌면 53%에 머물지도 모르는 게 삶이다. 내일, 아니 바로 이 순간이 지나서 나에게 죽음이 찾아올 수도 있지 않은가?
어떤 무언가를 돈과 건강과 시간의 대체재로 사용하는 것도 무리다. 대체재는 없다. 없는 건 없는 것이다. 다만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일은 가능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새소리와 일주일 사이에 자취를 감춘 작은 꽃 군락을 기억한다든지, 나팔꽃이 피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피거나 피지 않고 사라져도 그럴 수 있다고 수긍하는 일, 그리고 음악과 이야기와 어두운 전시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편안한 좌식 의자에 몸을 밀착시키고 멍하니 벽을 응시했다. 왼쪽은 흑백 화면이다. 전깃줄에 앉은 새들이 보인다. 새가 떠나고, 새가 찾아오고, 전깃줄이 흔들리고, 새가 움직이는 화면이 계속된다. 오른쪽은 컬러 화면이다. 걷다 보면 흔히 보는 콘크리트 틈새를 비집고 나온 풀과 소나무 열매와 초록 덩굴이 등장한다. 고정된 사진이 아니라, 동영상이다. 화면 속의 그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다. 오랫동안 두 화면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벅찬 떨림, 벅찼다. 이유는 모르겠고 그냥 벅찼다, 조금씩 움직이는 전깃줄과 식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다음은 이런 의자를 사야겠구나 했고, 다음은 그냥 멍하니 있을 수 있었다. 시간을 보내다 혼잣말을 했다. 내게 필요한 건 멍이었구나 하고.
박선민 작가의 이 설치 작품 제목은 <모든 떨리는 것에 대한>이었다.
감히 설명과 해설을 할 수 없는 세계, 그 세계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 세계가 떨리고 있다는 것도 또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모른다. 돈과 건강과 시간이 없더라도 나는 또 견디면서 살아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