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현이 엄마 이름은

아이들의 엄마, 아빠 이야기

by 열무샘


“방학 동안 준현이 눈높이 학원에 보낼 거예요.”

“학원 보다는 일대일로 배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일대일은 안 돼요. 그냥 학원에 보내야 해요."

“왜요?”

“우리 동네에는 남자 선생님이 온데요. 남자가 저희 집에 오는 거 안 돼요. 집에 누가 오는 거 힘들어요. 특히 남자는. 수리 기사 올 때면 남편이 집에 꼭 있어요.”

“…….”

“…….”

“준현이 어머님, 그럼 우리 이렇게 해요. 방학 1주일은 한글 교실에 보내시고, 나머지 시간은 눈높이 학원에 보내시고, 그리고 어머님이 책을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준현이한테는 읽고 쓰고 것도 중요하지만 듣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휴우. 그게요.”

“무슨 문제가 있어요?”

“제가요. 글자가 안 보이거든요, 글자가 두 개 세 개씩 겹쳐 보이고, 색깔이 너무 밝으면 그림도 글도 아무 것도 안 보여요. 책을 읽어줄 수가 없어요.

“…….”

“고도 난시예요. 어릴 때부터 글자 읽기가 힘들었어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

“…….”




<꼬마 곰에게 뽀뽀를>을 함께 읽고, 아이들한테 한 명씩 순서대로 읽어보라고 했다. 준현이는 첫 장부터 힘들게, 한 숨을 쉬며 책을 읽었다. 역시 무리였다. 계속 읽으라고 하면 준현이 힘만 빠질 게 뻔했다. 내용을 모르는 건 물론이고, 사랑스러운 <꼬마 곰>을 싫어할 수도 있다.

얼른 준현이랑 같이 책을 읽고, ‘뽀뽀’ ‘암탉’ ‘고양이’ ‘스컹크’ 같이 반복되는 글자만 혼자 읽어보라고 했다. 책을 끝까지 읽은 준현이가 “아휴, 끝났다.”며 좋아한다. 하이파이브를 한 후, 다른 아이를 부를 때까지 준현이 엄마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구나 우리 아이들을 보면 쉽게 떠오르는 말.

“엄마, 아빠는 뭐하는 거야?” “한 가정 부모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학교에서 해 주면 뭐해. 집에서 안 도와주는데.” 더 심한 말도 나온다. 그건 아이 상황이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저럴 거면 왜 낳았데?”

나도 그랬다. 처음에는 자주 그랬다. 시간이 지나면서 횟수가 줄어들었다. 지금은 아이의 가족에 대해서 아예 생각을 안 하려 한다. 아이들 부모와 보호자 이야기를 안 하는 건, 내가 이해심이 풍부하거나 특별히 훌륭해서가 아니다. 생각하고 말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니까, 순전히 나를 위해서다.

준현이도 그랬다. 유난히 학습 발전 속도가 더딘 준현이, 친구를 보고 ‘저 녀석’이라고 부르는 적절치 않은 언어 습관, 한 번 울면 멈추기 힘든 길고 긴 울음, 친구가 때렸다고 이른 다음 뒤에 숨어버리는 소심한 준현이.

엄마도 소심하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런가 했다. 준현이 엄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준현이가 받침 글자를 읽게 만드는 것도 어려운데 엄마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준현이 엄마를 만났다. 한 가닥으로 긴 머리를 묶은 준현이 엄마는 평범한 30대 초반의 학부모였다. 안경알이 유난히 두터운 것 말고는 특별히 눈에 띄는 게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준현이 엄마 역시 소심하고 사회성이 떨어지구나 생각했다. 우리 아이들의 엄마 중에는 소심하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이들이 많다. 안산 선부동 밖을 나가지 않은 보람이 엄마, 말 나눌 친구가 없어 담임선생님과 수다를 떤다는 예슬이 엄마, 전화기 너머로 아이를 깨워서 학교에 보내겠다고 힘없이 말하던 엄마들.

준현이 엄마도 그렇게 소심한 엄마 중 한 사람인 줄 알았다. 눈이 그렇게 나쁠 거라고는, 책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보기 힘들 정도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글자를 읽기 힘드니까 그만큼 사회생활이 힘들 수밖에 없을 테고, 힘든 사회생활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꺼릴 수밖에, 그만큼 세상과 사람이 두려울 수밖에 없는 거였다.

세상에는 글자를 읽기 힘들 정도로 눈이 나쁜 사람이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생각해 보았다.


선부동 밖을 나가지 않았던 보람이 엄마도, 말할 상대가 없다던 예슬이 엄마도, 한글 선생님인 나를 만나기도 힘들어하던 전화로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그 많은 엄마들은 또 어떤 사정이 있던 걸까? 그들은 그들의 사정을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복지도 마을 만들기도 그들의 이웃이 되지 못한다면 다 쓸 데 없는 게 아닐까? 아니, 나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을까? 아이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 아닌 그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일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




준현이 엄마 이름이 궁금하다. 준현이 엄마가 아닌 진짜 이름이 있을 텐데. 고도 난시라고 해도 인터넷 검색을 하고 싶을 텐데, 뭔가 방법을 함께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떤 음료를 마시겠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무작정 준현이 이야기를 한 것도 미안하고,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는지, 아르바이트하면서 힘들지는 않은지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렇게 매번 후회하고 매번 반성 한다. 준현이 엄마가 아닌, 준현이 엄마의 진짜 이름을 불러줬어야 하는데, 누구 씨라고 말을 건넸어야 하는데.


준현이 엄마의 이름이, 또 다른 아이의 가족이, 가족이 아니더라도 같이 사는 이들이 궁금하다. 그들 모두에게는 이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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