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범이 이야기
# 바람이 귀를 날려 버릴 것 같았다. 모자를 눌러쓰고 주머니에 두 손을 감춘 채 정거장으로 걸어갔다.
“어디 가요?”
많이 듣던 목소리, 뒤를 돌아보니 범준이다.
"범준아, 안 추워?"
얇은 점퍼를 입은 범준이가 자전거 위에서 날 빤히 쳐다보았다. 코끝은 까칠하고 뺨은 빨갛다.
“안 추워요.”
“깜깜한데 자전거 타는 거 위험하지 않아?”
“뭐가 위험해요?”
“집에 들어가지, 추운데 있지 말고.”
“놀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디 가요?”
네모난 얼굴에 찢어진 눈, 일자로 가지런히 자른 앞머리, 볼과 콧등에 박힌 주근깨. 본인은 다 컸다고 생각하겠지만 귀여운 아기 얼굴이 여전히 남아 있다.
“집에 가. 너도 얼른 집에 들어가.”
“싫어요.”
집에 들어가는 게 싫다는 건지, 잔소리가 듣기 싫다는 건지 모르겠다.
"안녕히가세요."
준범이가 자전거 페달을 밟고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를 올리려는지 몸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게 보였다.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이 차가울 텐데, 바람 따위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앞으로, 앞으로 달려갔다.
# 그림이 많고 글자가 적은 그림책, 퀴즈를 맞히면 상을 준다니까 열심히 듣고 있다. 다들, 딱 한 사람 준범이만 빼고. 준범이는 몸을 배배 꼰 채 책상만 보고 있다. 4학년이 1, 2학년 동생들 사이에 끼여 그림책을 듣는 게 자존심도 상하겠지 싶었다. 아기별을 기다리더 바위 나리가 시들시들 죽어가는 장면,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만들고 집중을 하는데, 준범이가 불쑥 말을 꺼냈다.
“선생님, 이런 거 말고요. 동영상 보여주면 안 돼요.”
“뭐?”
“있잖아요. 재밌는 동영상, 애니나 웃기는 거 있잖아요.”
폭풍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네가 나랑 공부하는 이유는 어쩌고, 한글이 어쩌고, 약속이 어쩌고, 상품이 어쩌고, 집중력이 어쩌고. 나도 내 잔소리가 듣기 싫은데, 준범이는 오죽하랴 하면서도 잔소리를 그만둘 수가 없었다. 시작된 잔소리를 어떻게 마무리할지 궁리하면서 나는 잔소리를 했다. 계속.
집중을 못하고, 공부방 학습은 거의 안 하고, 문제집은 하나도 제대로 풀지 않는다. 준범이는 3월에 5학년에 올라간다. 한글을 읽을 때는 한 자 한 자씩 천천히, 전체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고, 일곱 줄짜리 시를 3초 만에 다 읽었다고 해서 내용을 물어봤더니 하나도 대답하지 못했다.
"준범이 어디 갔니?”
아이들은 답 대신에 깔깔 웃기만 했다. 책상 밑에서 준범이가 나왔다. 웃으니까 작은 눈이 하나도 안 보였다. 지지난 시간에 나랑 한 판 하고 나서 부쩍 장난을 친다.
“수업하자.”
책을 폈다.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은 책에 집중을 했다. 준범이도 많이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준범이가 몸을 배배 꼬더니, 수형이를 건드리는 게 보였디.
“공부시간이잖아! 공부 안 할 거야!”
준범이 입이 삼센치는 더 나왔다. 그러더니 하는 소리가!
“예. 안 할 거예요.”
수업 중단, 준범이와 나는 사무실로, 큰 소리로 야단을 치는 나, 대답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준범이.
휴, 괜찮아 싶었는데 왜 또 저러지, 저 아이를 어떻게 하면 집중시킬 수 있을까,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아닐까, 가만히 앉아 있는 게 그렇게 힘들까?
# 한글 교실에 오는 아이들 대부분이 산만하다. 처음에는 짧은 그림책을 읽어주는 데도 집중을 못한다. . 아이들은 장난을 치거나, 혼자 뭔가를 만지작거리거나, 딴생각을 한다. 몇 명의 아이들은 그림책 자체에 거부감을 보인다. 눈살을 찌푸리고, 안 읽으면 안 되냐고 한다. 쓰기는 더 힘들어한다. 단어 열 개를 쓰는 데 20분이 넘게 걸린다. 학습 효과가 없는데도 선생님인 나는 수업 규칙을 위해서, 단어 열 개를 쓰라고 한다. 읽기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문장 서 너 개를 읽으라고 해도 짜증을 낸다.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집중력은 더 떨어진다. 가끔 가다 누구, 누구 ADHD 아닐까 혼잣말을 한다. 아이들 중 몇은 정말 ADHD를 앓고 있을 수도 있다. 문제는 내 눈에 ADHD 증상을 가진 아이들이 너무 많다는 거다.
전문가들은 말한다. ADHD를 앓는 아이들은 실제로는 적다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에게 쉽게 ADHD 딱지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고. 전문가의 견해를 존중한다면 둘 중에 하나다. 첫째, 내 진단이 틀렸다. 아마 이 쪽이 맞을 것 같다. 난 수업에 지친 프로그램 교사의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았으니까. 둘째, 한글 교실 아이들 중 ADHD 환자 비율이 평균치보다 높다. 혹시라도 이 추측이 답이라면? 불공평하다. 왜 ADHD는 저소득 가정에, 소외 가정에 집중되는지 화가 난다. 아니었으면 좋겠다.
# 며칠 전에 발가락에 멍이 들었다. 짐작보다 통증이 오래갔다. 걷기가 힘들어, 도서관에 가다가 포기했다. 병도 서로 손을 잡고 오는 게 좋은지 위통이 시작되었다. 몸이 아프니까 기분도 나빠졌다. 누구한테 이야기했더니 혹시 이런저런 일로 우울해서 몸이 아픈 게 아니냐고 했다. 속으로 비웃었다. ‘여보세요, 발가락에 멍들어본 적 있어요? 생각보다 아프거든요. 걷는 게 힘들어서 도서관에 도착한 책도 못 빌려보라고요. 짜증이 나거든요’라고.
두꺼운 책이 내 새끼발가락 위로 수직 낙하한 건 물리적 사실이다. 타박상으로 시퍼렇게 멍이 들고, 발가락의 특성 상 통증이 오래가는 것도 통계적 수치가 증명한다.
나는 울적해서 아픈 게 아니라, 아파서 울적한 거다.
# 한글을 배우지 못한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다. 입학 첫날 선생님은 칠판에 이상한 그림을 그리더니, 그게 선생님 이름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1년이 가고, 2년이 가고 3년이 가고, 4년이 가고, 5년이 가고, 6년이 가고, 7년이 간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청소년들 중 한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아이들 중 하나가 자신은 수업 시간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는 게 싫었다고 말했다.
한글을 모르니까, 모르는 채로 수업을 들어야 하니까, 딴짓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산만해서 읽고 쓰는 게 힘 게 아니라, 읽고 쓰는 게 힘들어서 산만해진 거다.
# 빵 냄새를 맡은 샌지, 빵 냄새를 맡았으니 돈을 내라는 빵집 주인, 돈이 없는 샌지와 막무가내의 빵집 주인, 현명한 재
판관, 아이들이 이야기를 재밌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이야기의 어떤 부분이 아이들을 집중시키는 걸까? 내가 재미있다 싶은 이야기와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는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아이들, 어른인 나는 나. 차이는 항상 존재한다.
줄거리를 말해보라고 했더니, 막내 수찬이까지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준범이도 이야기를 한다. 중간에 유치원생 목소리를 내며 귀여운 척을 한다.
ADHD는커녕 모범생 준범이다. 연령이고, 수준이고 깜장 고양이한테 주라지. 아이들이 좋아하면 그걸로 됐다.
“종이 더 주세요.”
“그렇게 쓸 게 많아?”
준범이는 대답도 않고 계속 뭔가를 썼다. 이제까지 읽었던 그림책 제목을 쓰라고 했는데.
뭘 쓰나 싶어서 슬쩍 봤더니, 어제 읽어 준 <샌지와 빵집 주인>의 줄거리를 쓰고 있다.
어려운 글자를 물어보기는 했지만, 틀린 글자도 눈에 띄고 띄어쓰기도 엉망인 것 같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쓰고 있다.
나는 준범이가 글자를 알아도 글자를 읽지 못하고, 쓰는 건 더 힘들 거라고 자체 진단을 내렸었다.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 장을 더 쓰고 나서 또 한 장을 달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책 제목을 쓰기 시작했다. 중간에 내가 읽어 준 책 말고 다른 책도 좋다고 했더니, 신이 나서 책 제목을 계속 써갔다.
계속, 계속. 결국 내가 이제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계속.
#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도,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는 일처럼 즐겁고 행복한데.'
준범이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니다. 아무리 책이 좋은 들 자전거 타는 것과 같을까, 몸을 움직이고 햇빛과 바람과 함께 달리는 게 얼마나 좋은데.
그래도 글자가 자전거 타기의 반에 반만이라도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느리지만 차근차근, 준범이의 마음 높이에 맞는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면, 그렇다면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