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교실 모든 아이들 이야기
1. 가정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마다 숨을 막는 단어가 있다. 집, 가족, 가정.
한글 교육을 책임져야 할 곳은 가정이 아닌, 공공교육이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이 없다. 당위적으로 옳은 말일지 모르나, 현실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말일뿐이다.
한글은 학교 입학 전에 한글은 당연히 떼야한다. 다문화 가정이라면 모를까 대한민국 부모라면 아이의 읽기와 쓰기를 책임져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 아이들은 당연하고 가뿐한 일도 해내지 못한 비정상적 가정(비정상적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부정확한지 안다.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무엇인지 판정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쉽게 정상과 비정상을 이야기한다. 비정상적이라는 표현 안에 비정상을 말하는 사회에 대한 혐오가 들어 있음을 이해해주기를)에서 자란 셈이다.
이혼, 한 부모 가정, 조부모 가정, 기초 수급 대상자, 몸 혹은 마음의 병을 앓는 엄마,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 아이들의 집은, 가정은 어딘가 삐끗거리고 어딘가 구멍이 나 있다.
아이의 엄마는 고도비만과 우울증을 동시에 앓고 있었다. 엄마는 아이를 심하게 때렸다. 입학하자마자 문제아로 찍혔던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입학 첫날부터 교실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함을 쳤고, 교사의 호출을 받은 아이의 부모는 학교에서 아이를 때렸다. 무지막지하게. 아이의 부모는 지적장애를 앓고 있었다.
한글교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가난하다. 아주 가난하지 않은, 학습지 교사의 방문수업을 받는 아이가 들어오면 안심이 된다. 이런 아이는 거의 다 1학년이다. 글자를 익히는 속도도 빠른 편이다. 하지만 아이가 한글 교실에서만 글자를 배운다면, 아이의 집이 가난하거나 여유가 없다면, 속도는 두 배, 세 배 그 이상으로 느려진다. 3학년이 돼도, 심한 경우 6학년이 되도록 글자를 모를 가능성이 있다. 못 먹고 못 입는 것만 가난한 게 아니다. 가난은 아이의 삶 구석구석에 영향을 준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 가난한 이를 만나지 않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이들을 막고 있는 첫 번째 벽, 비정상적이고 가난한 가정,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글을 아는 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아이가 한글을 가르치지 못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글자를 모르는 걸 당연히 받아들이는 걸까? 대한민국 국민이라 한글을 아는 게 당연하다면, 모든 가정의 아이들이 한글을 읽고 써야 한다. 그 아이의 집이 아무리 문제가 있고, 가난하고, 비참하더라도.
2. 첫 번째 교실
중,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초등학교는 수업을 받는 모든 아이가 한글을 읽고 쓴다는 전제에서 진행된다. 3월의 1학년 교실도 마찬가지다.
글자를 모르는 1학년 아이는 학교가 갑갑하고 수업이 힘들기만 하다. 적절치 않은 양육환경에 처한 아이라면 더욱 힘들다. 교실에 앉아 있는 것도 싫고, 선생님도 싫고, 친구도 싫다. 싫으니까, 힘드니까, 괴상한 행동을 한다. 옆에 있는 친구를 괴롭히고, 공연히 고함을 지르고, 교실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떼를 쓴다. 학교는, 교실은 글자를 모르는 아이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다. 싫고, 짜증 나고, 두렵고, 낯설고, 침울하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두 번째 단추는 더 엉망이다. 4월이 되면 시작하는 받아쓰기, 지문을 읽어야 풀 수 있는 수학 문제, 아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교사, 공부 못하는 바보라고 놀리는 친구들 사이에서 아이는 괴상한 생존 방법을 채택한다. 거친 폭력을 행사하나, 떼를 쓰거나, 눈치를 보거나, 극도로 움츠려 든다.
세 번째 단추, 네 번째 단추, 마지막 단추까지 모두 엉망이다. 돌이킬 방법이 없어 보인다. 개별학습이니, 혁신이니, 외국 사례니 말하기 싫다. 그냥 딱 한 가지만, 교실에 글자를 모르는 아이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아이도 교실의 한 주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아이들이 시시하다고 아우성을 쳐도, ‘가’와 ‘나’를 가르치고 글자 없는 그림책을 읽어줘야 한다. 그다음에 사교육과 기초학습과 한글 교실에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
무엇보다 1학년 아이들 중 글자를 모른 채 학교에 들어온 아이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머리로만 인정하는 게 아니라, 교육 실천으로 그 인정을 드러나야 한다.
3. 배제와 낙인
학년이 올라가고,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학교는 잔인해진다. 한글 교실이니 기초학습이니 하는 그나마 받던 지원도 끊어진다. 비용 대비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공교육은 국민의 읽기와 쓰기 교육을 수행한다. 그러니까 공교육을 받은 대한민국 국민 중 문맹자는 없어야 한다. 글자를 모르는 아이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공식적으로 글자를 모르는 아이가 없는 기이한 상황, 학교는 기이한 상황을 냉정하게 헤쳐 나간다. 무시와 배제라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2학년 쌍둥이가 있었다. 둘 모두 읽고 쓰는 데 서툴렀는데, 언니 쪽이 더 심했다. 일제고사 기간이었다. 언니만 한글 수업에 들어왔다. 언니가 말했다. 동생이 담임선생님과 일제고사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담임교사는 언니를 깔끔하게 포기했다. 효율성만 따지면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내 앞에서 기말고사 공부를 안 한다고 좋아하는 아이는, 아무리 가르쳐도 힘만 드는 아이는, 한글 선생님인 내게 사랑한다고 편지를 주는 아이는 ……. 학교가 한글을 모르는 아이를 어떻게 배재하는지에 대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이 정도 사례는 아무것도 아니다.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무시하고 배제해도, 유령이 아닌 살아있는 아이는 교실에서 문제 행동을 일으킨다. 한글을 모르는 게 제일 큰 문제 행동이고, 나 좀 봐달라고 온 몸으로 표현하는 것도 다 문제다. 그냥 있는 둥 없는 둥 얌전히 있어주면 고마울 정도다.
교사와 친구들, 교실과 학교는 아이에게 수식어를 붙여 준다. ‘기초학력 부진아’. ‘복지 대상자’, ‘정서 장애와 사회성 결여’는 그나마 객관적인 표현이다.
‘바보’, ‘떨어지는 아이’, ‘문제 가정’, ‘폭력 아동’, ‘어떻게 해도 소용없는 문제아’, ‘학교 부적응자’, ‘낙오자’, ‘패배자.’
한 번이라도 낙인찍혔다면, 마음과 몸에 무시무시한 생채기를 낼 수 있는 수식어다.
배제와 낙인, 어느 한 가지 만으로도 힘들 텐데, 아이들은 둘 모두를 경험한다. 가난하고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이미 상처를 받은 아이는 계속, 계속 더 가혹한 상황에 놓인다.
배제를 하는 주체, 낙인을 찍는 주체는 동일하다. 당신은 교사와 학교가 주체라고 말하고 싶을 테다. 하지만 그건 불공평하다. 나와 당신을 포함한 우리 사회 모두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아무래도 그렇다.
4. 세상
따뜻한 이야기, 희망찬 결론.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떤 가난하고 불쌍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글자를 몰랐습니다. 학교에 들어간 아이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아이를 안타까워하던 어른이 있었습니다. 어른은 아이를 도와줬습니다. 아이는 한글을 깨쳤습니다. 아이는 그 어른을 평생 잊지 않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 이야기가 이랬으면 좋겠다고, 이럴 수 있다고 많은 이들은 생각할 것이다. 한글 공부를 가르치는 나 역시 이 행복한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웃기지 말라고, 그건 판타지며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첫 번째 단추를 제 자리에 끼우지 못한 아이가 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더 적절한 교육 방법과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이렇게 저렇게 겨우 한글을 익힌다고 해도 배제의 경험과 아이를 따라다니는 낙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나마 학교는 나은 편이다. 열여섯이 되고, 스물이 되면서 만나는 세상은, 아이가 아닌 성인이 돼서 마주하는 세상은 더 잔혹하다.
배달을 하는 아이, 공사장에서 일하는 아이, 피시방에서 잠을 자는 아이, 학교를 그만둔 아이, 누군가와 쉽게 사랑에 빠지고 살림을 차리는 아이, 너무 일찍 부모가 된 아이, 기초 수급자 아이, 철가방을 든 아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 화젯거리가 되지 못하는 사람,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하는 사람, 생산력을 갖추지 못하는 밑바닥 인간, 구제불능의 빈자, 자신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자신도 타인도 알지 못하는 이.
글을 쓰는 내내 불편했다. 현실이 이러한데 아이들과 함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이란 말인가 하는 자괴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 하나, 하나를 통째로 묶어서 희망 없는 아이로 규정하는 게 아닌가 싶어 움츠려 든다.
하지만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냐고, 우울한 글을 쓰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세상이 부정적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해야 할 게 보인다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