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붉은 꽃을 싫어한다. 진저리를 치는 엄마를 보며, 어떤 때는 엄마의 심리건강을 의심하기도 했다. 몇 년 전, 엄마가 붉은 꽃과 관련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평생을 괴롭히던 엄마의 어머니, 외할머니에 관한 이야기였다. 십 년이 넘는 연하의 애인과 봄나들이를 떠난 외할머니가 붉은 모란꽃 아래에서 활짝 웃는 사진은 엄마에게 오욕과 치욕, 또 어떤 욕이 있을까, 을 안겨주었고, 엄마의 평생에 분명한 얼룩을 남겼다. 냉정하고 차가운 태도부터 더 깊은 얼룩까지.
5월이 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모란을 본다. 저 붉은색의 모란을 대하고 나는 모란은 왜 붉은빛일까 혼잣말을 한다. 생명의 진화 과정에서 붉은 모란은 붉은색을 가지게 되었을 텐데. 혼잣말의 당연한 결론을 앞에 두고 또 혼자 웃는다. 저 자명한 자연의 법칙이 피붙이인 엄마를 진저리 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하다. 원인은 중요하지 않아, 다만 현상일 뿐이지.
흰꽃을 본다. 여느 때보다 여름이 빨리 올 것 같다. 나뭇잎이 연두에서 초록으로 이미 가버린 것 같다. 그 초록의 한가운데서 흰 꽃은 어느 색보다 더 눈에 들어온다. 초록이 한참인 계절에 피는 꽃은 스스로 흰색을 선택했다. 벌과 나비에게 초록에 묻히지 않는 자신을 봐달라고. 내게 와서 얼른, 나의 종족번식을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더운 여름, 힘든 여름, 꽃의 노력에 어쩐지 숙연해진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어른의 몫 중에는 '왜'를 찾는 일이 있다. 왜 저 아이는, 왜 이 아이는, 왜, 왜, 왜. 알아야 할 일이다. 이유는 필요하다. 붉은 모란이 붉은색이고 여름의 흰 꽃이 흰 색인 이유를 알아야 한다.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쉽기도 하다. 전부의 이유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이유는 관찰과 생각과 약간의 공부로 찾을 수 있다. 찾고 나서는 어떨까? 일단은 편하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나는 그렇다. 어렵지도 않고, 안심도 된다. 하지만 곧 정말 하루도 안돼서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아이는 사람은 어떠 어떤 이유로 안간힘을 쓰면서 지금의 모습을 행동을 장착한다. 그 모습과 행동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에게는 그렇다는 거다. 흰꽃이 흰색 꽃인 이유와 같다. 여름의 무성한 초록 속에서 살아남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래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의 흰색은 누군가를 괴롭힌다. 붉은 모란이 엄마를 평생 괴롭혔던 것처럼, 누군가를 어떤 환경을, 어쩌면 자기 자신을 평생 괴롭힐 수 있다.
복잡하다. 역시 세상살이가 그렇지 뭐하고 넘어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또 그렇지 않다.
"아직은 어색해서 그런지 작가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가 어려웠다. 혹시라도 질문이 실례가 될까 봐 더 그랬던 것 같다.
어린이 한 명, 한 명을 독립적인 작가로서 생각하고 그에 맞는 질문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예를 들어 이거는 왜 그린 거예요?(왜 했어!? 가 아닌 의도가 궁금해서 하는 질문)라고 묻기보다
이 부분(그림)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어요?라고 물어봤을 때 원하는 방향의 답을 들려주었다.
다들 이미 충분히 작가의 자질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왜 이것을 그렸는지?'에 대한 진지한 답도 한 번쯤 들어보고 싶다."
아이들의 책 만들기를 도와주는 젊은 예술가가 아이들과 명함을 만들고 나서 쓴 글이다. 처음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을 때, "저는 아이들이랑 지내는 건 못해요. 친절하게, 친하게 못 지내는 데."라고 했던 이 친구의 말을 떠올린다. 아이들이랑 못 지낸다고 스스로를 고백해서 그랫을까, 일정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해서 그럴까, 질투가 느껴질 정도로 훌륭하다. 왜 그렸냐고 물어보는 게 아니라, 설명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보다니. (아... 나는 오랫동안 아이들과 밀착해있었어. 벗어나고 싶어. 존재형태를 바꿔야 해. 뭐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고 변덕이 다시 도질 정도로.)
어쩌면 나는 빛이 어떻게 그 색을 만드는 지만 주목했는지 모른다. 색은 색 그 자신의 이야기가 있을 텐데 말이다. 붉은 모란은 붉은 모란의 이야기가, 흰 꽃은 흰 꽃의 이야기가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