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dophile 로드트립 _ 에스페란스
서호주에서 길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며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로망으로 꼽히는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으며 나는 언젠가 그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하곤 했다. 가는 길만해도 700km가 넘는다는 이야기는 그 여행지가 왜 사람들의 로망이 되었는지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 시간에 100km를 달린다고 해도 장장 7시간을 길 위에 있어야 된다는 계산이 빠르게 머릿속을 지났다. 먼 여정이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정의 짐을 꾸렸다. 나라는 사람이 집을 떠나 생활한지 어언 1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어려운 것은 필요한 것과 필요없는 것을 구별하는 것과 짐을 꾸리는 일. 여행자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 없다는 것은 가장 큰 결함이었지만 어쩌면 나라는 사람은 구멍이 많기에 조금 더 풍부한 여행을 하는 중인지도 몰랐다.
여행을 떠나는 날, 날씨가 좋다는 것은 여행운이 좋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는 아웃백 지역에 속하기도 하는 에스페란스로 긴 여정을 떠나는 중이었다. 운전을 하지 못하는 나에게 탑재된 것은 눈치였기에 뜨거운 물을 가득 끓여 보온병을 채우고 컵라면과 커피, 간단한 간식을 준비하는 것 모두 내가 해야할 몫이었다. 상상을 초월할만큼 길게 늘어진 길을 보며 이따금 착시현상에 빠져드는 것은 나만이 겪는 일도 아니었는지 잊을만하면 쉼표(P)사인이 도로 여기저기에 등장하곤 했다. 한참을 달리다 저려오는 다리를 위해 잠시 멈춘 쉼터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여행자들이 잠시 발을 디딛고 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호주를 여행하며 처음 마주하게 된 다양한 식생들은 여행을 하며 발견하는 또 다른 재미 중 하나였는데 숲 속 여기저기에 솟아오른 글라스트리(Grass Tree: 잔디나무)는 그 유래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아주 예전, 공룡 만화를 보면 어렵지 않게 등장하던 삐죽삐죽한 나무가 바로 이 녀석인데 지구 탄생 이래로 가장 오래된 식물 중 하나라고 한다. 이들이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내셔널지오그래픽에도 등장한 적이 있을만큼의 특이한 번식 환경 때문인데 무척이나 건조해 잎들의 부딪힘이나 번개에 의해 자연적으로 산불이 발생하기도 하는 호주의 특성에 맞춰 이들은 화재 속에서 씨를 틔우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산불(Bush Fire: 부시파이어)가 지난 곳을 지날 때면 언제나 촘촘하게 자라난 글라스 트리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하늘이 무척이나 파랬다. 한국과는 달리 호주의 12월은 무척이나 따갑고 뜨거운 날씨를 자랑하는데 건조할대로 건조해진 날씨는 종종 산불 소식을 전하곤 했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곳곳에 건조한 정도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등장해 화재에 대한 경각심을, 길을 떠나는 모두에게 알려 주었다. 일 년에 한 두번 즈음 한국에 전해지는 호주의 산불 소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대지를 불태우곤 했는데 이따금 파란 하늘을 뒤덮는 뿌연 연기를 마주할 때면 언제나 뉴스를 켜 불이난 지역과 피해 규모를 확인하곤 하는 것이 호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과 중 하나였다. 조용한 나라 호주에서 산불보다 더 큰 이슈는 정말로 특종이라 부를만한 것들이었다.
건조한 정도를 알려주는 표지판을 지나 본격적으로 로드트립이라 부를만한 시간들이 시작되었는데 눈 앞에 끝도 없이 펼쳐진 도로와 그 위로 물감을 흩뿌려 놓은 듯 파랗게 쏟아지는 하늘은 이따금 내가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초록 사이로 눈에 띌만큼 화려한 색을 뽐내는 이 나무는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피어난다고 해서 '크리스마스 트리Christmas Tree'라는 이름을 가졌다.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긴 여행 중에는 달력과 시간을 볼 일이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창 밖의 모든 풍경들이 숫자를 대신하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숫자가 정형해둔 시간을 벗어나 길 위에선 내가 만들어가는 시간과 자연이 흩뿌리는 시간이 나라는 사람을 더욱 나답게 만들어주었다.
창 밖으로 흩어지는 풍경들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보면 이따금 여행자를 위한 누군가의 장난스러운 장면들이 시선을 사로잡곤 했는데 에스페란스로 가는 길의 외로운 트럭과 그 곁을 지키고 서있는 듯한 나무 한 그루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장면 중 하나가 되었다. 엉뚱한 호주 사람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게된 것은 그들의 순수한 친절과 여행자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는데 사실 인종차별에 대한 사람들의 질문에 내가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이유는 내가 만나온 호주 사람들은 마음이 따뜻하고 나에게 손길을 내밀어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뜨거운 도로 위를 달리는 자전거 여행자를 위해 자동차 안에 있는 시원한 콜라 한캔을 내밀고, 긴 여정에 지친 여행자를 위해 도로 한 켠에 작은 예술품을 전시해둔 엉뚱한 친절이었으니 말이다.
외로움에 대한 나의 정의가 바뀌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바로 여행이었다. 호주로 떠나오기 전, 미국에서의 시간들이 나에게 처음으로 외로움에 대한 정의를 깨닫게 한 시간이었다면 호주의 시간들은 외로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광활한 대지와 바삭거리며 말라가는 풀잎들 속에서도 꿋꿋하게 초록을 지켜내는 나무나 풀들을 만날 때면 나는 그들의 생명력과 그들의 근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지곤 했는데 풍경에 대한 끝없는 의문들은 결국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나를 데려다 놓곤 했다. 외로움의 시간이 나에게 삶에 대한 질문과 스스로에 대한 답으로 이끌어 가고 있음은 여행을 아주 오랫동안 이어오던 날, 붉은 석양 아래서 순간의 깨달음처럼 밀려왔다.
햇살은 본인의 역할을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내리 쬐더니 어느덧 밤에게 시간을 내어주고 거짓말처럼 저물어가고 있었다. 로드트립의 시간도 점차 저물어 가는 중이었다. 대부분의 야생동물들이 햇살이 사그러드는 해질녘부터 활동을 하는 호주에선 해가 지고 운전을 하는 일을 추천하지 않는데 실제로도 로드트립을 하다보면 길가 여기저기에서 배를 뒤집은 채 독수리나 파리의 먹이가 되고 있는 캥거루나 염소, 들소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실제로 캥거루를 친 적도 있는데 성인의 몸무게만큼인 캥거루를 치는 경험은 썩 유쾌하진 않은 일이라 강한 트라우마를 남기곤 했다. 해가 더 저물어가기 전에 우리는 엑셀을 힘차게 밟았다. 에스페란스라는 글자 옆에 있던 숫자가 어느 덧 8에서 1로 바뀌어가는 중이었다.
한참이나 화창하던 날씨가 에스페란스에 다 다르자 어느덧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인도양과 맞닿아있는 서호주 퍼스와는 달리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에스페란스는 남극해와 마주하고 있어서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밤이 되면 조금은 차가운 온도를 뿜어냈다. 먹구름이 몰려오는 중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광경들조차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라보는 중인지 삼삼오오 모여 바다를 향해 길게 늘어진 제티 위에서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낮은 해안선에 정박하지 못하는 선박들을 위해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만들어낸 제티는 호주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인데 오늘 날에는 배들을 위한 역할보다는 동네 주민들의 낚시터이자 관광명소가 되었다.
에스페란스의 또 하나의 명물은 해안을 찾는 바다사자인데 낚시꾼들이 던져주는 물고기를 받아 먹기 위해 제티 주위를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바닥을 헤엄치는 물고기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남극해에서 살아가는 바다사자는 에스페란스라는 동네가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밤이 되면 뭍으로 올라와 잠을 청하는 녀석을 위해 제티 주변에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데 바다사자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경고문이었다. 인간을 위해 자연을 개발하는 우리네의 모습과는 달리, 이 곳은 자연을 위해 사람들의 불편이 포용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잠시 빌려쓰는 자연에 대한 감사함과 배려를 함께 가지고 있다. 자연이 인간을 위해 베풀어 줄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기 전에 인간이 자연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보며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에스페란스에서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그림같은 풍경 앞에서 쉬이 떠나지도, 머물지도 못한 채 나는 한참을 서성거리는 중이었다.
사람들의 버킷리스트에 놓여 있는 이름이 왜 '에스페란스'인지를 떠올리며 나는 아주 오랫동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번도 오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와본 사람은 없을 만한 곳, 나는 그 곳을 에스페란스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Travel note
Destination : Perth - Esperance
Distance : 714km
Reference
+ 긴 로드트립에 필요한 것들 : 함께 따라부를 수 있는 노래(90-2000년대) / 컬투쇼 레전드 사연
통신이 되지 않는 곳에서도 볼 수 있는 지도책
컵라면과 뜨거운 물, 커피 그리고 주전부리
침낭과 텐트, 조리, 세면도구, 수건
빨래집개, 간단한 한국 스낵류(캠핑장에서 외국인들과 친해질 수 있는 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