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쩌면 파라다이스

Hodophile 로드트립 _ 에스페란스

by J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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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마자 나의 오감은 창 밖으로 향해 있었다. 다행히도 후두둑 거리는 빗방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비가 올거라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지난 밤 하늘을 향해 화창한 하늘을 보게 해달라던 간절한 기도가 어느정도 맞아 떨어진 모양이었다. 들뜬 마음에 주유를 하지 않고 부랴부랴 출발했는데 중간지점을 지나 문득 확인한 계기판에는 어느새 새빨간 주유등이 온도만큼이나 발갛게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호주에서는 도심에서 한참을 벗어나야 포인트가 등장하는데 오늘의 목적지인 에스페란스 국립공원도 도시에서 무려 70km를 달려야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차에 던져두고 바닷가로 향하는 표지판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순간, 거짓말처럼 새하얀 백사장과 말그대로 에매랄드 빛 바다가 눈 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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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라는 감탄사만이 흘러 나오던 시간

나는 더할나위없이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 앞에서 그 표정 외에는 그 무엇도 설명이 되지 않았을테니까. 아이를 낳고도 아름답게 그을린 탄력적인 몸매를 자랑하는 여인이 남편과 아이를 해변에 두고 성큼성큼 차가운 물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인간은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는 또 다른 모습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깨달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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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하나 둘 해변을 채우고 있었다. 형제로 보이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엄마가 맞춰준 옷을 입고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바다 위로 까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잔영을 만들어냈다.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나눌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에 대해 그리고 지금 이 바다를 보며 떠오르는 사람에 대해 나는 짧지 않은 낙서를 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아마 아름답다는 말보다 더 그럴싸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나는 조금 서투른 글솜씨에 괜히 심술이 나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글은 언제나 깊이를 담아내지만 그 깊이를 담아내는 그릇을 만들어내기에는 나라는 사람이 여전히 작다는 걸, 광활한 풍경 앞에 서면 언제나 느끼게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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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지가 어디인가요? 라고 물으면 모두가 오랜 고민없이 떠올리던 이름의 장소.

구글에서 Esperance라는 이름을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등장하던 것은 캥거루가 누워 있는 해변이었다. 럭키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또 한 켠에서는 캥거루 해변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실제로도 이 해변에서는 캥거루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꼬불꼬불 수풀 사이를 달려 갑작스럽게 등장한 푸른 빛에 감동한 것은 아마 나만의 몫은 아니었는지 이따금 나에게 에스페란스 사진을 보여주던 이들은 모두 이 각도에서 바다를 담곤 했다는 걸 이 곳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esperance.jpeg Ref. Scoop Magazine, Australia

실제로 캥거루가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해변으로 오늘 날엔 사람의 손을 탄 캥거루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자연보호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호주라는 나라이기에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을 국립공원 관계자에게 발각되면 벌금을 내야하지만 여전히 캥거루들은 캠핑장에 머무는 사람들 주위를 어슬렁 거리며 크고 작은 음식들을 받아 먹고 있는 모양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에스페란스 바다를 찾는 캥거루들은 그렇게 사람과의 거리를 좁혀가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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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아름다웠고 기억은 짙어졌다. 해변에 아무렇게나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도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사람도 하나의 풍경이 되어 아름다운 한 장의 엽서가 되었다. 이 해변의 이름을 다시 짓는다면 나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바다'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은지 신이 있다면 물어보고 싶었다. 그 누구도 행복해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오랜만의 일이라, 나는 감히 그 풍경 속에 하나의 일원이 되어도 괜찮은지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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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해를 마주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에 나는 큰 맘을 먹고 물안경을 끼고 바다로 헤엄쳐 들어갔다. 너무나도 투명해서 먼 거리까지 시야가 확보되는 바다를 헤엄쳐 다니는 것이 인생에 있어 쉬이 찾아오는 경험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나에게 짙푸른 바다까지 헤엄쳐 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아닐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마주한 환경이 다른 호주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부러움이 떠오르게 된 건 새로운 환경에 도전하는 일이, 안정적이지 않은 일을 선택하는 것이 남과 다른 일이기에 두렵게 느껴지는 세계에서 자라게 된 나의 아쉬움이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20여년의 삶을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던 생각과 가치관들이 하나 둘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듣는 것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아직 영글어지지 않은 생각들이 무너져내린 틈 사이를 비집고 나와 새로운 세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조금씩 몸집을 부풀려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언젠가 방황하던 나에게 배는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뱃머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글귀가 담긴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남들보다 조금은 뒤쳐진 내 스스로를 위로해주던 말이 문득 머리를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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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자의 주식은 스파게티와 컵라면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1차 산업이 발달한 호주에서는 과자를 사먹을 수 있는 돈으로 고기 한 덩이를 구할 수 있다. 지갑이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양파와 고기, BBQ소스, 아침용 사과를 구매했다.

퍼스와 떨어진 마을에서는 동양인을 여전히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과 눈이 마주친다면 살짝 눈인사를 하는 것을 추천한다. 물론 인종차별은 어디에나 있는 문제이지만 사실 나는 그럴만한 상황들을 금새 잊어버리는 편이라 이내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내고 또 쉽게 친해지곤 했다. 그렇게 친해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 상황이 언제든 있을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한다면 긴 여행 길에서 조금은 열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다. 나쁜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주 작은 조각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우리는 이내 훌훌 털고 다시 걸어갈 용기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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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석양은 가슴이 아릴만큼 강렬하고 아찔하다. 몇 번이고 두 눈과 마음에 담은 풍경이지만 그들을 매일 봐도 또 다시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 착각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다른 온도와 습도 그리고 또 다른 자연과 태양을 마주하는 것이니 어쩌면 매일 새로운 석양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시간이 온 몸을 비추었다가 이내 서서히 능선 너머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조금씩 작아지는 시간이 슬퍼서 나는 눈을 깜빡이지 않으려 애를 썼고 거짓말처럼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석양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건 어쩌면 그들이 사라지는 시간이 아쉬워 눈을 깜빡이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설명하고 싶어졌다. 아니 그렇게라도 말을 해야 그 눈물이 조금이라도 설명될 것만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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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찍지도 못하는 카메라를 들고 아직 빛이 채 쏟아지지 않는 하늘을 향해 렌즈를 가득 열었다. 초보자의 카메라에는 다행히도 남반구에서만 보인다는 남십자성이 예쁘게 담겼다. 그 별이 얼마나 선명한지 호주 사람들은 국기에도 남십자성을 담았다. 길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 볼 때면 습관처럼 남십자성을 찾는 버릇이 생긴 것도 나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닌가보다. 호주 사람들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 볼 때에도 그들은 언제나처럼 남십자성을 기준으로 하늘의 길을 찾곤 했으니 말이다. 사람들과 수다스럽지 않은 이야기를 천천히 나누는동안 별똥별 몇 개가 머리 위로 긴 선을 이으며 사라졌다. 나는 나보다 먼저 떠오른 그 누군가를 위해 소원을 빌었다. 별똥별이 내 눈가로 떨어진 모양인지 눈꼬리를 따라 뜨거운 별 하나가 사람들 몰래 포물선을 그리며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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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note


Destination : Esperance - Cape Le Grande

Distance : 70km

Reference

+ Lucky Bay, 캥거루 해변으로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해변이다.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캠핑장과 함께 인 곳이며 화장실/샤워실 그리고 간이카페를 만날 수 있다.

+ HellFire Bay, 럭키베이보다는 조금 더 한산한 해변으로 일광욕과 함께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 Frenchman's peak, 트레킹코스로 에스페란스 바다와 내륙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이른 아침부터 트레킹을 시작하는 사람이 많으며 충분한 물을 들고 트레킹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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