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존재에 대한 생각

Hodophile 로드트립 _ 에스페란스

by J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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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페란스를 하루만에 떠나기엔 무척이나 아쉬움이 남았지만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여행자에게는 아쉬움조차도 여행의 조각 중 하나였다. 지난 밤 여기저기에 펼쳐 놓은 짐을 꾸리고 오늘은 또 다시 먼 거리를 운전해 남극해가 맞닿아 있는 또 다른 마을인 알바니로 향하게 된다. 알바니는 호주의 역사가 시작된 도시로 아주 오래 전 이 곳에 정착하려 했던 사람들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장소이다.


길고 긴 길 위에 무덤덤하게 놓여진 간판은 여행을 하면서 찾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재미 중 하나, 휴게소가 있다는 소식은 언제나 반갑지만 여행자의 가벼운 지갑이 가끔은 야속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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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화장실에 들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웃백에 덩그러니 놓여진 로드하우스의 화장실은 적당히 운치를 가지고 있는데 그다지 깨끗하지도 지저분하지도 않지만 그 존재만으로 감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우리가 오늘 달리게 되는 도로는 호주의 1번 국도로 호주 해안선을 따라 둥글게 이어져 있는 가장 긴 도로이자 메인 도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숫자들이 표지판 위에 아무렇지않게 놓여진 모습을 보면서 호주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 더 크고 말랑거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여행한 거리와 면적이 큰 역할을 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들에게 서울-부산의 거리 즈음은 어렵지 않게 달릴 수 있는 코스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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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세렝게티 초원을 연상케하는 초원이 끝없이 이어졌다. 동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차이 뿐이었지 아프리카의 초원과 호주의 초원은 규모와 웅장함에 있어서는 비슷한 아우라를 자랑하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뜨거운 여름 햇살에 노랗게 타버린 듯한 들판이 마치 벼가 익어가는 시골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 추운 겨울을 나고 있을 할머니 생각이 간절해졌다. 내가 자유롭게 여행을 하는 동안 할머니의 주름은 조금씩 깊어가게 되는 자연스러운 순리가 아름다운 풍경 앞에선 모순처럼 더 아프게 다가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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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 도심을 지나 The Gap Park에 도착했다. 과거부터 거센 파도와 바람으로 배들을 좌초시킨 악명높은 알바니의 해안선은 다른 해안선들보다 더 다양한 지형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파도에 의해 깎여 만들어진 Natural Bridge와 그 곁에 있는 The Gap이다. 과연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이런 거대한 자연을 만났을 때가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도 조금씩 모습을 바꿔갈 거대한 자연을 눈에 담는 일은 스스로가 겸손해지기 위해 꼭 필요한 순간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파도와 바람에 의해 거대한 바위가 잘게 부숴지고 그들이 자그만 돌멩이와 마침내 작은 모래알이 되기까지는 아마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시간이 걸릴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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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의 바다는 하얀 거품이 그득한 카푸치노 생각이 간절하게 만들었다. 과거에 이 곳에서 좌초되었던 배들이 차마 알바니 해안에 닿지 못하고 흩어져 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건 그 거대하고 엄청난 힘의 바다 앞에 비로소 내가 서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씩 파도에 의해 작은 부분으로 조각나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보며 몇 번이나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아마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들이 작아지는 모습은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파도와 여전히 싸우고 있지만 그들이 살아온 억년의 세월은 여전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단단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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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틈을 비집고 올라온 파도가 흩어지며 무지개를 만들어냈다. 파도가 힘차게 철썩 칠 때마다 생겨나는 무지개에 사람들은 때에 맞춰 감탄사를 내뱉고 셔터를 눌러 댔다. 금새 사라지는 희망이라도 때에 맞춰 우리에게 도착해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작은 설레임으로 다시 먼 길을 걸어갈 수 있을텐데. 우리가 바라는 희망은 때론 무지개보다도 더 깊고 짙은 무엇이라 신은 쉽게 그 것을 들어주진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에게 신이 줄 수 있는 건 무지개 한 조각처럼 아주 작은 행복이었던 것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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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는 유럽인들이 서호주에서 가장 처음으로 닻을 내린 장소이다. 엄청난 군대를 이 곳에 정착시켰지만 바람이 불고 파도가 드높은 환경과 자주 우중충해지는 날씨를 피해 점점 북쪽을 향해 나아가며 오늘의 주도인 퍼스와 프리맨틀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었다. 그 시절 영국인들이 지었던 건물들은 서로의 출생년도와 이름표를 붙인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호주의 클래식한 분위기는 100년도 넘은 건물들이 과거의 모습과 함께 오늘의 분위기를 함께 갖추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나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은 공간에서 커피 한잔을 마실 때면 시공간을 초월한 장소에 와있다는 생각에 여행의 맛이 더욱 깊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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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문을 열어 출근길 사람들의 손에 커피를 든든하게 쥐어주고 해가 지는 오후 4-5시 언저리가 되면 그들은 문을 닫을 준비를 한다. 카푸치노 같은 파도를 바라보고 잔뜩 커피에 대한 목마름을 안고 도착한 나에게 여전히 영업 중인 카페는 이보다 더 반가울 수 없는 모습이었다. 동네 주민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오후를 보내는 모습을 보며 내가 비로소 여행을 떠나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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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에서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 들린 레스토랑이 마침 이 곳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일 때 밀려오는 환희는 경험한 사람은 알지 못하는 감정일 것이다. 무작정 들어간 레스토랑이 어느덧 만석이 되고 웨이팅이 하나둘 생겨나는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충만한 저녁을 마무리했다. 워킹홀리데이 학생들이 이따금 머물기도 하는 도시인지라 우리에게 머무는 시선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문득,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는 외로움이 작은 쾌감처럼 밀려오던 순간, 아마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비로소 나를 바라보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물음을 던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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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note


Destination : Esperance - Albany

Distance : 480km

Reference


+ The Gap & Natural Bridge 알바니에서 Top5에 손꼽히는 명소 중 하나로 알바니 타운에서 15분 정도 떨어져 있다. 거대한 바위가 거센 파도에 의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를 볼 수 있으며 오늘 날에는 안전을 위해 투명한 룩아웃 포인트가 만들어져 있다. 파크 입장료는 무인정산기로 계산해야하며 자동차 대시보드에 관리자가 확인할 수 있도록 올려두어야 한다.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알바니에서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 좋다. 공구상가를 비롯해 캠핑장비, 차량용품 등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큰 도시는 마가렛리버 혹은 퍼스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만나기 어렵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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