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헛헛하고 외로운 날
이 책은 좋아하는 언니의 인스타그램에서 처음 만났다. 그냥 어떤 선명한 이유없이 좋아지는 사람, 나에게도 그런 대학 선배가 있었다. 노란색은 그리움의 색이라며 노란 편지를 고이 접어서 건내주던 언니가 좋아하는 책이라며 올린 책이 바로 박준 시인의 산문이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하나같이 반짝이고 아름다워서 나는 그녀가 읽는 책들을 조금 더 마음으로나마 이해하고 싶어 그녀의 서재 속 책들을 한권씩 읽어내려갔다. 굳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써내려가는 글의 온도는 내가 가지고 있는 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녀가 고른 모든 책들이 내 마음에 들었지만 이 책은 특히나 더 그러했다. 제목부터 마음을 울리지만, 읽을 때마다 서로 다른 페이지 귀퉁이를 접어야 할 만큼 시인의 마음이 무척이나 좋았다. 좋아하는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는 편인데 이 책은 이병률씨의 끌림, 박웅현씨의 여덟단어 다음으로 많이 읽은 책이다. 마음이 문득 헛헛해지는 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곁에 두고 읽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아서 나는 오늘도 이 책을 꺼내 읽었다. 아마 지금 이 순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며 나는 책의 따뜻한 구절을 나누고 싶어졌다.
p11
그늘
남들이 하는 일은
나도 다 하고 살겠다며
다짐했던 날들이 있었다.
어느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
걷지 않아도 될 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
▶ 들어가는 말에 적힌 이 구절을 보며 울음을 울었던 기억은 언제나 선명하다. 걷지 않아도 되는 길을 선택하며 외로운 삶을 걸어가는 내 모습과 너무 닮아서, 나는 책을 열자마자 몇 번이고 소리내어 울었고 그 울음은 여전히 위로로 기억되고 있다.
p19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중략)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 남는다.
꼭 나처럼 습관적으로 타인의 말을 기억해두는 버릇이 없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에 꽤나 많은 말을 쌓아두고 지낸다.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p23
폐가는 자신과 함께 살던 사람의 시간을 풍장시키듯 서서히 기운다. 깨진 유리창과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바람을 마주 들이기도 하며. (중략) 떠난 이를 기억하는 일은, 아직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과 꼭 닮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p51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 같아.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일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그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다 다시 금세 고독해지기도 하면서."
▶ 오랫동안 스스로 외로워 본 사람만이 아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외로움이 결코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것은 말이다. 나는 이따금 외롭기 위해 혼자 기차를 탄다. 그렇지 않다면 알지도 못하는 이름의 마을에 가는 일을 즐긴다. 외로운 시간은 비로소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털어놓기에 더할나위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p63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 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선생님의 이 말은 당시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삶의 장면 장면마다 불러내는 말이 되었다. 비 오는 오후의 술 생각처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 혹은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의 냉수처럼 간절한 말.
▶ 나에게도 이런 말을 건내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삶은 누구에게나 다 공평하다고, 그러니 너도 용기를 내어 살라는 헛헛한 위로를 건내주는 어른이 언제고 언제고 필요했다. 그 갈증이 남아 어른이 되어 버린 나는, 내가 그런 어른이 되어주겠다고 마음을 먹어본다. 이런 위로는 삶의 많은 부분을 겪어낸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무엇이기에 말이다.
p65
그동안 나는 참 많은 말들과 사람들과 시간들을 믿었다. 믿음이 깨지지 않은 말도 있었고 믿음이 더 두터워진 사람도 여럿이었으며 생각처럼 다가온 시간들도 있었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경우에서 내 믿음은 해지고 무너지고 깨어졌다. 딛는 마음, 마음마다 폐허 같았다.
그렇지만 이 마음의 폐허에서 나는 다시 새로운 믿음들을 쌓아올릴 것이다. 믿음은 밝고 분명한 것에서가 아니라 어둡고 흐릿한 것에서 탄생하는 거라 믿기 때문이다. 밤이 가고 다시 아침이 온다. 마음속에 새로운 믿음의 자리를 만들어내기에 이만큼 좋은 때도 없다.
p70
울음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
흐르고 흘러가다
툭툭 떨어지기도 하며.
p83
답서
내일 아침빛이 들면
나에게 있어 가장 연한 것들을
당신에게 내어보일 것입니다.
한참 보고 나서
잘 접어두었다가도
자꾸만 다시 펴보게 되는
마음이 여럿이었으면 합니다.
p93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대상은 '그 누군가'가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은 감정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나에게 유일해지고 싶은 감정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라면 부를 방법이 없다.
p94
사람이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건,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남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 상실의 시대 '작가의 말' 중에서
p110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p111
광장의 한때
누구인가를 만나고 사랑하다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사람을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엇인가 모르는 구석이 생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의 세계 속에서 자라는 상대가 점점 울창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 이것은 내가 상대의 세계로 더 깊이 걸어들어왔다는 뜻이다.
p129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 마음 한철
p136
일과 가난
나는 왜 거절도 못하고 이렇게 일을 받아두었을까 고민하다, 그것은 아마 내가 기질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한없이 우울해졌다. 가난 자체보다 가난에서 멀어지려는 욕망이 삶을 언제나 낯설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자랐지만 결국 가난을 선택한 것은 나였기에, 그런 내 선택의 책임을 가족들에게 넘기고 싶지 않아 스스로가 선택한 가난이었다. 친구들이 모두 월급이라는 것을 벌며 아름다워져 가는 동안 나는 가난이라는 컴플렉스를 가지고 살아왔던 것 같다. 시인의 글을 읽으며 비로소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지독한 습관이라는 것을 깨닫고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글이 위대한 것은 그 것을 통해 비로소 누군가가 하고 있는 생각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p141
노동과 삶에 지친 날이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에서 설핏 가난을 느낄때면 나는 그때 아버지의 말을 생각한다.
p143
광부의 삶과 저희 아버지의 삶은 너무 닮아 있었습니다. 하루 일이 끝났다는 사실만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 그렇고 생의 대부분을 노동과 다음 노동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수면욕, 식욕 같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만을 채우기 급급하다가 나이가 들어 병을 얻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 땅의 노동자들은 기약 없는 자신의 삶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한번 시작된 일의 끝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p148
시작은 역시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그분의 말은 달랐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한창 힘들 때겠어요. 적어도 저는 그랬거든요. 사랑이든 진로든 경제적 문제든 어느 한 가지쯤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지요. 아니면 모든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거나. 그런데 나이를 한참 먹다가 생각한 것인데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나이 먹는 일 생각보다 괜찮아요. 준이씨도 걱정하지 말고 어서 나이 드세요."
충격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후회로 채워둔 사람과 무엇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간에 어느 한 시절 후회없이 살아냈던 사람의 말은 이렇게 달랐다.
p157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p180
다만 어떤 글은 누군가에게 읽히지 않아도 쓰이는 일만으로 저마다의 능력과 힘을 가지는 것이라 믿는다. 마치 마음속 소원처럼. 혹은 이를 악물고 하는 다짐처럼.
p186
살아오면서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맞이해야 할 때가 많았다. 부당하고 억울한 일로 마음 앓던 날도 있었고 내 잘못으로 벌어진 일에는 스스로를 무섭게 몰아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무겁고 날 선 마음이라 해도 시간에게만큼은 흔쾌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 여긴다. 오래 삶은 옷처럼 흐릿해지기도 하며. 나는 이 사실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모른다.
다시 새해가 온다. 내 안의 무수한 마음들에게도 한 살씩 공평하게 나이를 더해주고 싶다.
p191
늦은 밤 떠올리는 생각들의 대부분은
나를 곧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글을 좋은 글이라 믿는다.
요즘처럼 가벼운 글들이 흔하게 쏟아져나오는 시대에 잔잔한 무게를 지닌 글을 만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쉽게 읽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글, 그런 글을 써내려가는 건 어쩌면 길고 긴 장문의 문장들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 많은 이들이 시가 어려운 문학이라 부르는 것이리라. 그의 마음의 삶이 담긴 글을 읽으며 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고 또 몇 번이고 눈물을 흘렸다. 접어둔 책 귀퉁이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지만 이 책이 질리지 않는 이유는 그의 삶과 나의 그것이 조금은 닮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를 한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몇 번이고 그를 안아주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