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청년과 카르마

텔레그래프스테이션 Telegraph Station

by J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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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melin Pool

서호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한결같이 이 곳을 떠올리곤 했어. 누군가에게는 제대로 된 샤워를 할 수 없는 낡은 카라반파크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이 곳이 서호주의 모든 낭만을 꾹꾹 눌러담아 놓은 곳이었거든. 100년도 넘은 낡은 건물은 세월에 걸맞게 시간의 흔적을 온 몸 구석구석에 꾹꾹 눌러 담고 있었어. 반짝거리는 새 것보다 오래된 것에 더 마음을 두는 버릇이 있는 나에게는 이 곳이 다른 어느 장소보다 적절했던 것 같아. 무심한 듯 친절한 주인 아주머니와 대충 정리한 듯한 카라반파크는 외로운 여행자가 마음 한 켠에 있는 삶의 설움을 몰래 두고 떠나도 그 것마저 카라반파크의 일부가 될 것 같기도 했고 말이야. '텔레그레프 스테이션'이라는 긴 이름은 이 곳이 얼마나 가치로운 곳인지를 숨기기 위한 듯 보였고 그 사실이 이 곳에 더 마음을 두게 만들었어. 끼룩 거리며 요란하게 열리는 현관문과 허물어져가는 카라반파크의 리셉션은 자질구레한 기념품을 비롯해 여행자에게 당장(!) 필요한 식료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 곳에서 돈을 주고 산 것은 언젠가 기억에서 잊혀지려 할 때 즈음에 꺼내볼 사진 엽서 한 장과 당장 마실 와인 한 병 그리고 커피 한잔이었지.






0U4A2702.JPG Telegraph Station

몇 번을 다녀왔지만 삶의 가장 목마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이 뜨거운 곳이 떠오르는 건 모두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 때문이라고. 첫번째 인연은 로한(Rohan), 남호주 애들레이드 출신인 그는 긴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했어. 여기저기 녹슨 흔적이 가득한 낡은 밴과 어깨 너머로 보이는 자질구레한 잡동사니 그리고 강아지의 흔적이 남아있는 뒷좌석의 엉성한 침대는 로한이 오랜 여행자임을 말해주는 듯 했고 시큰둥하게 내 손길을 느끼는 강아지 조지아(Georgia)만이 너의 유일한 친구이자 말동무처럼 보였지. 밴이 고장나 멈춰 서게 된 너는 카라반파크의 궂은 일을 하며 숙식을 제공 받는 중이라 했고 내가 주문한 카푸치노를 열심히도 만들어 주었어. 마른 주머니를 털어내 건낸 4.50달러의 커피는 그야말로 뜨거운 물을 태워 만든 어떤 것이었지만 나는 나의 반응을 살피는 너를 보며 그 커피를 빈 속 가득 채워 넣었지. 커피가 아니라 너의 정성을 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그 곳에 머물던 2박 3일의 짧은 시간동안 나는 사람들이 떠나면 카라반파크의 샤워실과 부엌을 정리하는 너를 보며 하루를 보냈고 그러는 동안 조지아는 내 곁에서 짧은 낮잠을 자곤 했어. 1년 간 우유 한 팩을 채울만큼의 비도 오지 않는 샤크베이에서 밤을 보낸다는 것은 그리고 그 어떤 인적도 없는 조개껍질 해변에 누워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젊은 남녀의 입맞춤 없이도 충분히 아름다운 일이었던 것 같아. 아마 그 배경 속에 내가 아닌 그 누군가가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것을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말했을만큼. 우리는 이따금 바닷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조지아의 발자국 소리를 음악처럼 들으며 오래도록 스테인리스 컵에 담긴 와인을 마셨지. 너는 고장난 자동차의 부품이 도착하면 다시 낡은 밴을 몰고 호주의 북쪽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말했어. 너무도 우습지만 어제 만난 나와 함께 떠나고 싶다는 말과 함께 말이야. 내가 까무룩 잠들지 않은 채 너의 이야기에 오래도록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더라면 나는 그 낡은 밴을 타고 계속 여행 중이었을까. 가끔 그런 허무한 상상을 하고 마는 건 길 위에서 낯선 내일을 향해 마주한 로한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었고, 그 모습을 오래도록 닮고 싶어서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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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인연은 바로 탐(Tom), 나와 결코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 우리는 추위를 떨쳐 내기 위해 지핀 모닥불 곁에서 만났고 그는 나에게 친절하게 마시멜로우를 건냈어. 예쁜 부인과 집 한 채 그리고 캠핑카까지 가지고 있던 너는 길 위에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졌다며 모닥불을 가만히 응시하다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켰지. 언제 끝날 지 모를 긴 여행 중이라는 너의 지난 시간은 원양 어선을 타고 나가 크고 작은 물고기를 잡는 일이나 건축을 돕는 일 그리고 부동산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고 이제서야 너는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의미를 찾는 여정을 떠나는 중이라는 말을 건냈어. 그 비루한 삶의 시간 속에서 운명처럼 아름다운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던 너의 표정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나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을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아. 삶의 의미를 찾아 쉼없이 여행을 하는 나에게 너는 네가 오랫동안 믿고 따르는 '카르마Karma'라는 단어를 알려주었지.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일들이 찾아온다는 뜻을 가진 말, 어쩌면 우리의 말로는 '업'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그 것을 모두가 잠든 밤 모닥불 앞에서 들으니 나는 조금 울컥 하는 것만 같았어. 오랫동안 그 카르마를 믿으며 살아온 나에게는 앞으로도 좋은 일들이 많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나는 조금 부끄러웠고 또 잠시 마음 한 켠이 뜨거워 지기도 했지. 행복해지기 위해 떠나온 이 여행길 위에서 나는 과연 행복한 사람인 것인지를 몇 번이고 물으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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