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공항에서

제시의 로드트립

by Jessie
@Kuala lumpur International Airport


전광판 위에서 Perth라는 다섯 개의 알파벳을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무래도 몸이 먼저 그곳을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꼬박 12시간을 소비해야 닿을 수 있는 나라, 하지만 한국과 고작 한 시간의 시차밖에 나지 않는 그 아이러니하면서도 아름다운 도시에 가기 위해 나는 2년이 넘는 시간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주머니를 짜고 짜내어 에어아시아 티켓을 마침내 손에 쥐었다. 마음을 먹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수백 분이었는데 결제 버튼을 누르고 떠날 날짜가 적힌 티켓을 받아 드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30분을 채 넘기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와 마음 사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곱씹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나에겐 퇴사에 대한 선언이 남아있었고 나름 큰 용기를 내어 퇴사에 대한 생각을 전했지만 부장님은 1년을 버텨야 어디든 쓸 수가 있다며 나의 퇴사를 다시 한번 고려해 보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사직서를 조심스레 집어넣은 채 회사에서 처음으로 2주간의 휴가를 낸 어마 무시한 신입사원이 되었다. 평생 살면서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드는 일들은 모두 저지르고 만 나였으니 이번 기회도 역시 나는 ‘못 먹어도 Go’를 야심 차게 외친 것이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부장님은 내 휴가계를 들고 이사님 방으로 들어가 본인의 사직서를 던지고 나오셨다. 이 충격적인 소식에 내 2주 휴가에 대한 다그침은 뒷전으로 밀렸고 덕분에 내 무개념의 2주 휴가는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게 되고 말았다.




결혼이라는 두 글자가 문제가 되지 않은 이유는 으레 서로를 구속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편견을 깨고 나는 전보다 더 추진력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쉽게 단념해버리고 마는 나의 가장 여리고 아픈 구석을 아프도록 꼬집는 짝꿍 덕분에 나는 잊고 있던 내 감정을 종종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냉정하게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짧지 않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그의 날카로운 훈련 덕분에 "에라이 가고 만다"라는 기특한(?)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는 내 머리를 쓰다 듬고선 창고의 먼지 쌓인 캐리어를 들고 씩씩하게 내려왔다. 밤 열한시, 그렇게 그와 함께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체크하며 그리웠던 곳으로의 여정을 꾸리게 되었다.







밤의 공항에서 / 최갑수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그간의 모든 긴장이 풀렸는지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에어아시아를 탔을 때의 그 어떤 불편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창가 쪽에 앉은 여자가 나를 두 번이나 깨워 화장실을 가겠다고 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오후 4시 반에 출발한 비행기는 날자를 넘겨 다음 날 새벽 5시 반이 되어서야 나를 퍼스에 뱉어냈다. 호주를 몇 번이나 들락거리며 교도소에 수차례나 방문한 기록이라던지(*누군가의 면회를 위해서였다) 관광비자를 몇 번이나 발급받은 덕분에 나의 입국은 언제나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이 있다는 나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공항 입국 관리자는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누구와 여행하는지를 물었고 퍼스에서부터 케언즈까지 차로 여행한다는 내 대답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손가락 지문 4개와 여권 사진을 모두 얻어간 후에야 비로소 나를 풀어주었다. 엄격한 입국 관리자를 만났지만 반면 짐 검사는 아주 가뿐하게 통과했고 여행의 몫으로 지불할 담배 한 보루는 다행히 걸리지 않았다. (내 여행 삯은 지난날의 빚 그리고 이 담배 한 보루로 얼추 밸런스가 맞아질 예정이었다)



온도계의 눈금을 자유롭게 넘나든 덕분인지 퍼스에 도착하자마자 코를 훌쩍거렸다. 겨울이라는 계절을 막 지나온 퍼스의 새벽 6시는 여전히 깜깜하고 어두웠지만 그 시간은 아침이 오는 기적을 만날 수 있는 축복 같은 타이밍이기도 했다. 나는 오랜만에 오렌지 빛으로 발갛게 물든 퍼스의 지평선을 따라 시내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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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일기 @jessie_evenfolio : https://www.instagram.com/p/B1zkgZ-lcPf/?igshid=whahra4d2cx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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