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하는 엄마의 베트남 적응기
독감으로 아들과 남편을 차례로 돌보던 2주였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오래간만에 육아에서 벗어나 오토바이를 잡아타고 호찌민 시내로 들어섰다. 유일한 취미인 카페 탐방을 위해서였다. 오랜만에 익숙한 얼굴에서 벗어나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공간에 앉았다. 모험 삼아 찾은 카페의 커피가 생각보다 맛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베트남에 도착하고 마신 커피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맛이었다. 직원이 친절해서 조금 더 만족감이 배가 되었다. 어쨌든 나름의 모험이 성공한 셈이다.
결혼 3년 차, 16개월의 남자아이를 키우는 우리 부부는 썩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조금 무리를 해서 베트남행을 선택했다. 원래 남편 혼자 제안된 장기 출장이었지만 생각보다 기간이 길었던 탓에 남편이 가족이 함께 움직이는 것을 제안했다. 물가가 비교적 저렴한 베트남에서 사는 것이 한국에서 아등바등 사는 것보다 조금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남편의 굳은 의지에 우리는 용감하게 짐을 쌌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순간이었다. 가전 가구가 다 갖춰진 집(Full option)에 입주하면 된다고 해서 박스 다섯 개와 캐리어 두 개만 들고 덜렁 호찌민 생활을 시작했다. 다섯 개의 박스도 돌을 넘긴 지 얼마 안 된 아기의 음식과 용품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해외 생활을 꽤 오래 해온 나였지만 날마다 악동 수치를 갱신하는 아들과 한창 뛰어다닐 강아지를 돌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되었다. 육아가 이토록 힘든 일이었는지 엄마에게 물었지만 엄마는 늘 “너희는 별 탈없이 고만고만하게 컸어. 고 녀석 왜 그렇게 엄마를 힘들게 하는 거야 정말”이라며 한숨을 쉬실 뿐이었다. 해주실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런 말이라도 위로차 건네는 것이셨을게다.
나의 하루는 이른 아침 6시에 어김없이 시작된다. 아이는 알람을 맞춰둔 것도 아닌데 그 시간이 되면 늘 울음소리를 내며 일어나 옆 방에서 자고 있는 나를 찾곤 했다. 매일 오토바이 뒤에 앉아 출퇴근을 하는 남편을 생각하면 후다닥 일어나 아이를 돌봐야 하지만 요즘은 괜히 심통이 나서 침대에 꿀을 발라놓은 것처럼 가만히 누워 자는 척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남편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이를 데려다 다시 베개에 눕히고 자장가를 들려주었다. 운이 좋으면 다시 잠이 들기도 하지만 대게는 더 크게 징징거리며 코끼리 다리처럼 뚱뚱해진 기저귀를 덜렁거리며 안아달라고 요구했다. 우유 한 팩을 물려주면 얼마 전까지는 얌전히 앉아 빨대를 쭉쭉 빨며 잠시라도 우유를 마셨지만 요즘은 우유 팩을 누르면 빨대를 통해 우유가 뿜어져 나온다는 원리를 이해하고 바닥을 온통 우유 범벅으로 만든다. 아침부터 진한 우유 비린내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셈이다.
아이가 우유 한 팩을 마시고 나면 여섯 시 반 언저리에 37살의 남편과 16개월의 아기, 3살 배기 강아지 그리고 35살의 내가 함께 산책을 나선다. 평생 산책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던 남편이 비로소 산책을 시작하게 된 것은 나의 오랜 바람이었으며 에너지가 분출하는 아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방법이 바로 산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서너 번, 우리가 함께 하는 30분의 산책은 베트남을 알아가는 시간이거니와 남편과 내가 가족으로서의 하루를 주고받는 시간이기도 하다. 남편의 회사생활과 내가 느끼고 있는 베트남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고 다시 로비에 서게 된다. 그렇게 짧고 굵은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남편은 출근 준비를 하느라 또 나는 아이의 아침을 준비하느라 각자 바쁘고 정신없는 시간을 마주한다. 남편이 나가는 모습도 채 보지 못하고 아기 엉덩이를 씻기거나 뒤치다꺼리를 하는 날도 종종 있다.
16개월의 남자아이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게다가 목청도 얼마나 큰 지 복도 끝에서도 우리 집 아이가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같은 층에 사는 모두가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아마 한 때 가수 연습생을 지냈던 아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이라고 조심스레 생각하며 아이를 이해하려 노력해본다. 대게는 냉장고에서 전날 만들어 둔 미역국, 청경채 무침 같은 것들을 꺼내 아이의 아침을 차려준다. 좋아하는 반찬을 집중 공략해서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나머지 음식들은 손으로 주무르거나 식탁 아래서 콩고물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아이를 보면서 아침부터 화를 삭이는 연습을 한다. 바닥이 더러워지지 않는다면 대게는 너그러이 아이가 무엇을 하든 허용해주는 편인데 그 시간 동안 나 역시도 하루의 기력을 충전할 카페인을 한 잔 마신다. 좋아하는 노래를 켜 두고 커피를 마실 때까지만 해도 나의 마음은 무척이나 넓고 깊어서 아이가 무슨 잘못을 하든 모두 포용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인내심은 급격하게 고갈되기 시작한다. 일단 오전에 1번 혹은 2번 정도 쾌변을 하는 아들의 뒷정리를 하는 일부터 쉽지 않은데 고집이 생기기 시작한 아들은 기저귀를 갈지 않기 위해 넓지 않은 집을 쉬지 않고 도망 다니며 강아지를 괴롭히고 심지어는 엉덩이를 씻다가 새우 꺾기를 시전 하기도 한다. 오전 10시 언저리에 첫 번째 낮잠을 자는 아들이기에 나는 벌써부터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아이가 눈을 뜨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하루 14시간 중에서 아이가 낮잠을 자는 두세 시간을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시간들은 온통 아이와 함께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조금 더 낮잠을 자주길 바라지만 아이가 크면 클수록 낮잠 시간은 점차 줄어든다. 엄마의 체력과 아이의 낮잠시간은 정말이지 반비례 곡선을 그리고 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낳으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이쯤에서 한 번쯤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선 육아종합지원센터 놀이방이나 도서관에 가거나 어린이집 가정보육을 맡기기도 해서 하루가 정말 후딱 흐르지만 베트남에선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육아는 온전히 나의 몫이 되었다. 낯선 나라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아이에게 베트남을 경험시켜주어야 하는 부담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오고 있다. 워낙 체력도 좋고 밖순이였던 나였지만 30도를 웃도는 후텁지근한 더위를 무릅쓰고 바깥활동을 하긴 쉽지 않았고 언어 장벽이나 위생적인 문제도 외출을 자꾸만 망설이게 만든다. 덜렁거리는 성격이라 아이를 대충대충 키우는 편이었지만 얼마 전 아이가 독감에 걸려 40도가 넘는 고열을 앓고 난 이후부터 선뜻 바깥 활동을 하는 것이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선 소소한 수준이던 진료비도 이곳에서는 10만 원을 호가하니 병원 문턱에 가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해외생활을 하다 보면 애국자가 된다는데 아플 때 제일 먼저 그런 생각이 든다. 물론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은 다르기에 한국에 돌아가면 지금의 마음들은 싹 다 잊고 지내게 되겠지만 말이다.
아이가 어른들처럼 식사를 할 수 있는 나이였다면 삼시 세 끼를 해먹여야 하는 부담도 없으니 시간을 조금 유동적으로 쓸 수도 있었겠지만 간이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유아식을 만드느라 하루에도 냉장고를 몇 번이고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아이의 밥상을 고민한다. 뭐 그래 봐야 소고기, 양파, 브로콜리 같은 것들을 넣고 볶아주는 결과에 이를 테지만 말이다. 이틀에 한 번씩 보리차와 아기 요리를 위한 육수를 끓이는 것은 덤이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식재료와 생수를 사고 이따금 집 앞 슈퍼마켓에 나가 과일을 산다. 아이가 잠들면 먹거리 쇼핑을 하느라 쉴 틈 없이 반나절이 흐른다. 별다르게 한 것도 없는데 벌써 하루의 반이 흐르다니. 아이의 점심을 먹이면서 문득, 이러다 금세 마흔이 되는 건 아닐까 서글퍼진다. 어느덧 나도 적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서른다섯이라니.. 한 때 내 몸도 탱탱하고 봐줄 만했던 것 같은데 요즘 거울로 들여다본 나는 중력의 힘을 그 누구보다 많이 받아 예의 바른 모습이 되었다. 가끔 아는 지인들을 만나면 왜 이렇게 말랐냐고 물어온다. 얼굴만 보면 피곤으로 인해 야위었겠지만 몸은 보지 않아서 하는 말인 것 같다. 진작부터 예의 바르게 살 것을 괜한 거부감으로 세월에 맞서 싸웠더니 가슴부터 제일 먼저 정중해지고 말았다. 엉덩이도 아이를 낳는 그 순간부터 급격히 예의 바른 존재가 되었다. 동방예의지국에 매우 적합한 구성원이 되어가는 중이라 위안 삼으며 하루의 반이 흐른다. 서글픈 마음은 뒤늦은 양치와 세수로 날려버리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