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400km의 기억들
4개의 도시
24개의 계절
126,400km
20대의 중반이 되고 내가 처음 짐을 싸서 도착한 곳은 동부의 큰 도시 ‘브리즈번’이었다. 운이 나쁘게도 내가 호주에 가는 동안 내 모든 것들을 품고 있던 캐리어는 목적지를 잃은 채 수 일이 지나서야 나에게 도착했고 나는 마트에서 다급하게 아무런 모양이 없는 3종세트 팬티와 생수 두어 병을 샀다. 그것이 나의 브리즈번에 대한 첫 기억이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한다면 브리즈번은 반듯하게 빌딩이 쌓여 있는 코너마다 크고 작은 카페가 자리하고 있었고 어딜 가나 곰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반듯한 햇살 냄새가 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브리즈번을 ‘City of Sunrise’이라고 불러왔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썩 친절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퉁명스럽지도 않았다. 여느 도시가 그렇듯이.
딱히 호주여야만 하는 이유는 없었다. 어디든 떠나고 싶었지만 우연히 내가 쥐어든 패가 나를 적도 너머의 나라로 인도했을 뿐이었다. 작은 읍내가 있는 마을에서 18년의 인생을 살면서 나는 늘 낯선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를 막연하게 동경해 왔다. 개구리가 쉬지 않고 노래하는 논두렁이나 귀에 자신의 등록번호를 귀걸이처럼 꽂고 있는 황소가 거닐고 있는 풍경이 아니라 완벽하게 다른 모습을 말이다. 농사를 짓고 공장에 다니시는 부모님에게 지원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굉장한 오산이었다. 그들이 타보지 않은 비행기를 태워달라고 스무 살이 한참 넘은 내가 떼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나는 스스로 기회를 찾아 13시간의 비행 끝에 남반구의 나라로 떠났다. ‘인턴’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 덕분에 떠나게 된 것이었지만 사실은 체계 없는 회사에서 보낸 6개월의 기억과 그 이후 몇 년간 한없이 방황하며 떠난 여정이 24개의 계절을 그곳에서 머물게 만들었다
‘워킹홀리데이’라고 부르기엔 ‘워킹’도 ‘홀리데이’도 아니었던 시간들. 무엇이라 묘사하기에는 분명치 않아서 내가 그곳을 그리워하는지, 미워하는지도 알아차릴 수가 없어서 오래 묵혀두었던 마음을 연필로 사각사각 써 내려가 보기로 했다. 대충 얼버무리며 덮어버린 마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 스스로가 알아차릴 수 있게 말이다. 오랫동안 글을 쓸 수 없어서 책상에 앉을 때면 늘 책을 읽었다. 마음이 방황하던 까닭이었다. 이렇게나 오래 방황할 수 있다니 어른이 된다고 단단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일까.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우울을 달래기 위해 나의 청춘이 담긴 외장하드를 꺼내 사진들을 가만히 꺼내보기 시작했다. 분명 그 사진 속에 있던 나는 쓰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마음에 담긴 말을 어쩌지 못해 미열을 앓던 사람 말이다. 많이 늦었는지도, 한참을 돌아왔는지도 모르겠지만 사진에 담긴 것들이라면 무엇이든 써보기로 했다. 쓰고 또 쓰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마음에 담고 있던 것들을 흘려보낼 수 있지 않을까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