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답을 찾지 못했는걸요

렐리에고스 - 레온

by J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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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틀 무렵, 아침 일찍 일어나 지난 밤 남겨두었던 볶음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여느 때처럼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H보다 먼저 발걸음을 재촉했다. 생각에 깊이 빠져버린 이의 아침은 많은 것들을 놓치게 만들지만 때론 많은 것들을 내려놓는 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아침이 오는 풍경은 발걸음도 멈추게 할만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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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타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로 이어지는 하나의 루트를 알려주는 작은 표지판들. 표지판이 걸려 있는 벽의 나이가 언뜻 느껴지는 자잘한 벽면의 금들은 오랫동안 이 곳에서 순례자들을 바라봐온 집의 나이를 알려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인적도 없는 조용한 마을에서 가리비는 저만의 빛을 발하고 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본연의 역할을 위해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녀석에게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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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부터 순례자들의 주요 휴식처가 되었던 이 곳 만시야는 2개의 순례길이 만나는 마을이다. 프랑스 왕실의 길이라 불리는 Real Camino Frances 그리고 남쪽의 푸에르타 데 산티아고 Puerta de Santiago가 만나는 마을로 한 때 가축시장으로 유명했던 역사가 있다. 여전히 마을 곳곳에 남아있는 깊은 역사의 흔적들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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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찍부터 멈춰 모닝 커피로 에너지를 충전하기로 했다. 만시야에 머물던 순례자들의 아침식사 시간이 막 지난터라 주인 아저씨는 내가 들어설 무렵에야 한숨을 돌리며 스포츠 채널에 집중하고 계셨다. 문득, 우리가 너무도 부러워하는 이 곳의 사람들은 오히려 자유롭게 매일을 걷고 깨달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여행지에서 만난 그들은 '일상'을 살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잠시 일상을 떠나 '여행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삶은 영원한 모순 덩어리인지도 모른다.



커피 한잔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길을 나섰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중세의 벽은 아직도 그 옛날의 위상을 간직하고 꿋꿋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없던 평평한 들판에 세워진 하나의 시대적 산물은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주곤 했다. 때론 사람을 '어떠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누군가로부터 이루어질 수도 있는 일, 그들이 하나 둘 쌓아올린 성벽을 보면서 나 역시도 시공간을 뛰어넘는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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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생각이 너무 많아"


사람들이 종종 나에게 건내는 말이었다. 염려의 의미를 담아 나에게 건낸 말이었겠지만 그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그 것을 하지말라는 결론에 이르곤했다.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사람에게 생각이 많은 것을 비판하기보단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는지 혹은 내려놓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길을 걸으며 사람들이 나에게 던졌던 말들이 떠오르고 그 때문에 괴롭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 생각의 끝엔 언제나 '그 것을 결국 선택하는 것은 바로 나'라는 결론에 이른다. 타자의 틀에 맞춰 내 몸을 잔뜩 웅크리고 맞지도 않는 일과 행동을 하며 살아가야할 이유는 없다. 물론 타인의 시선을 배제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들의 의견을 계속 되새김질하며 상처를 만드는 것은 결국 내 자신인 것이다. 나보다 먼저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의견은 나에게 좋은 방향을 제시해 주었지만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의견을 선택해서 들을 권리 또한 나에게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생각들을 털어내고 내려놓고 또 정리하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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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지나 다시 인적이 드문 길을 걷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는 도로 옆을 지나는 건 꽤나 스트레스 받는 일이었는데 차들이 지나가며 뿜어내는 먼지나 매연을 마시며 걷다보면 정신이 아득해지곤 했다. 순례길을 걸으며 mp3를 걷지 말자는 스스로와의 다짐이 있었지만 스트레스를 받기 보단 즐거운 이야기를 들으며 걷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얼마 전 카미노에서 함께 길을 걸었던 K오빠가 나눠준 철학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사랑'에 대한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줌으로써 시작된 강의였다. 사랑이라는 것은 '희생'을 감내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며 순수한 내 마음의 의지로 행하는 일이자 타인의 시선이 개입되면 안되는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길에서 큰 소리로 싸우는 걸 두려워하지도, 스킨쉽을 하는데 눈치를 보는 것도,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배경을 신경쓰는 것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나에게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를 물었다. 이 강의에 빗대어 보자면 나는 진정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 내 자신이 먼저 온전한 하나의 동그라미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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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의 쉼터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오랜 시간 걸어온 내 발은 어느새 퉁퉁 불었고 나는 신발과 양말을 모두 훌렁 벗어버리고 벤치에 앉아 가만히 발을 내려다 보았다. 여기저기 잔뜩 물집이 잡혀 힘들어 보이는 발, 그 언젠가 차에서 뛰어내렸던 흔적조차도 그대로 남았다.


발등 위로 남은 상처를 쓰다듬으며 나는 나에게 조심스레 읊조렸다. "잘 걸어왔어, 고마워"라고 말이다. 이내 주변에 누가 없나를 둘러보았지만 스스로에게 건낸 힘 있는 말은 분명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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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를 따라 걸으며 레온이 얼마나 큰 마을인지를 조심스레 짐작했다. 햄버거 생각이 도시에 다다르자 점점 더 짙어져가고 있었다. 이번 마을에서는 햄버거도 먹고 도시 구경도 부지런히 다녀볼 생각이다. 생각보다 나는 너무나도 씩씩하게 잘 걸어내고 있다.


레온은 과거 로마 군대가 주둔했던 도시로 한 때 수도였으며 몇 번이나 외부에 점령 당했던 역사가 있다. 순례길 초입엔 과거 레온의 모습이 많이 엿보이지만 광장쪽으로 접어들 수록 현대화된 레온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레온은 크고 작은 골목길들로 연결되어 있으며 로마 시대 유적에서부터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들까지 다양한 건축물들이 자리하고 있는 도시이다. 14만명이 넘는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 대도시로 6월 21일부터 30일까지는 스페인 최대의 축제인 산 후안과 산 페드로 축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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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은 생각보다 크고 근사한 도시였다. 사실 갑작스런 도시의 모습에 길을 잃어 알베르게는 찾지도 못하고 여기저기 헤매이던 중이었는데 어느새 그런 헤맴까지도 여행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기분에 사로잡혀 순례자의 본분을 잠시 잊고 말았다. 10킬로그램이 훨씬 넘는 배낭을 내려 놓을 생각도 잊은 채 활력이 넘치는 도시 여기저기를 담기 위해 셔터를 부지런히 눌러대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내딛는 곳으로 열심히 셔터를 누르며 걸음을 옮기다 햇살이 아름다운 공원(산프란시스코 공원)에 들어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간만에 두 눈 가득 담아보는 기분 좋은 햇살과 풍경에 나른해져 벤치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유로이 시선을 돌린 곳에는 할아버님 세 분이 따스한 모습으로 담소를 나누시는 모습이 담겼다. 여유로운 따뜻한 시선은 그와 비슷한 온도의 풍경들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음에 분명하다. 닮아가고 싶은 풍경을 만난 호기로운 설렘들이 카메라에 쉬지 않고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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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동안 벤치에 앉아 시선을 뺏겼던 나는 허기가 느껴졌을 때에야 알베르게를 찾을 정신이 들었다.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어렵지게 않게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도시의 크기만큼 큰 규모의 알베르게에서 다시 H를 만났다. 하루종일 떨어져 있어서였는지 조금은 반가운 마음이 드는 순간이다. 순서대로 차례를 기다려 알베르게에 묵기 위한 절차를 거쳤다. 내 뒤로 익숙한 얼굴들이 인사를 건내며 하나 둘 줄을 서기 시작했다. 침대에 침낭을 펴고, 샤워를 마치고선 무거운 배낭을 내려두고 나는 홀로 도시 구경을 나섰다. 제일 먼저 할 일은 그동안 짬짬히 써두었던 편지를 나의 후원자들(친구)에게 보내는 일, 낯선 나라의 우표가 붙어있는 편지를 받는 일은 생각보다 설레고 두근거리는 일이니까 말이다. 물론 그 것은 보내는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감정임에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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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대성당은 이렇게나 웅장한 모습이다. 광장에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는 이 건축물은 바로크에서 신 고전주의 양식으로 가는 흐름을 잘 보여주는데 당시 성당 설립을 후원하던 여러 부류 사람들의 특성이 담긴 이 건축물은 절제된 내부 장식과 풍부한 자연 채광 그리고 둥근 천장 장식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씨에스타를 피해야하며 성당 주변으로는 다양한 기념품 가게와 레스토랑, 인포메이션 센터가 있다. 그야말로 관광지로 유명한 도시라는 것을 오감으로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씨에스타로 인해 성당 구경의 타이밍을 놓친 나는 대도시를 만난 기념으로 아이스크림이라는 보상을 나에게 내려주기로 했다. 성당이 잘 보이는 명당 자리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콧노래를 부르는데 아는 얼굴이 다가와 인사를 건냈다. LA 미션스쿨에서 아이들을 인솔하려고 함께 온 브렛! 그는 얼마 전 순례길 위에서 만난 운명의 상대에게 고백을 했으나 거절 당하고 실연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일행과 떨어져 걷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일이었으니, 나는 그에게 달콤한 위로를 건냈다. 아마 그도, 나도 혼자였지만 외롭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동행을 만나 마음을 나눌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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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업이 하나의 대표산업이 된 레온은 관광객들을 위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살뜰히 갖추고 있었다. 내 눈 앞을 지나는 백마와 그가 끄는 마차에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5일 전 '이테로 라 베가'에서 혼자 방을 쓰며 씨에스타로 인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빵을 나눠준 독일인 자매였다. 우리는 그 하루의 짧은 인연으로 레온에서 너무나도 반가운 인사를 건냈다. 우리는 잠시 벤치에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들은 매년 휴가가 생길 때마다 스페인으로 날아와 일주일을 걷고, 그 다음 해에 다시 지난 번에 멈췄던 곳으로 돌아가 다음 루트를 걷고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산티아고를 매년 조금씩 걸어내고 있었다. 각자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지만 매년 함께 휴가를내고 의미있는 걸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으며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들의 짧은 여정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지는 알 수 없지만 밝고 따스한 한국인으로 기억되길 바랄 뿐이다. 우리는 다시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작별 인사를 나눴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시간을 보냈다. 홀로 앉아 있는 내 곁에 몇 몇 사람들이 머물다 떠났고 나는 광장 속의 사람들을 오래오래 마음에 담았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디든 비슷하다는 걸 나는 아마 이 풍경 속에서 이미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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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나를 위해 근사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마음에 드는 레스토랑을 발견하고 순례자 메뉴를 주문했다. 와인 한 병과 파스타가, 그리고 미트볼과 칩스가 등장했다. 테라스에 앉아 홀로 저녁을 먹는 동양인 소녀에게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이따금씩 지나쳤다. 나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으로 웃어보였다. 아주 오랫동안 테이블에 앉아 맥주 페스티벌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와인을 마셨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풍족한 식사를 하고 나자 나에 대한 자존감이 위로를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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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3일


오늘은 왠지 혼자 걷고 싶은 감정이 컸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무엇인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어제 알베르게에서 확인한 메일을 보니 기존에 일을 도와드리던 회사에서 급하게 손이 필요하다며 순례길을 그만 걷고 호주로 와줄 수 없겠냐는 이야기를 했다. 잠시 혼란스럽지만 어렵게, 아주 간절하게 오게 된 이 곳에 대한 마음을 접고 간다면 나는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에 이르니 자연스럽게 답이 내려졌다.

이제 400km도 채 남지 않았다. 시간이 무서우리만치 빨리 흐르고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그 어떤 답도 찾지 못했는데 말이다. 올해, 그리고 이 길이 끝나면 나는 그 어디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무엇을 해야하는 걸까. 발렌테처럼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큰 그림을 그려 바라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내일은 또 어떤 물음과 답들이 나에게 올까,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질문들은 내가 지금껏 피해왔지만 언젠가 내가 마주해야 할 질문들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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