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먹고 싶은 안주를 마음껏 시켜 먹을 수 있지만
이제 20년 지기가 된 02학번 대학 동기들의 모임이 끝나고...
금요일 저녁,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 모임이 있었다. 정확히는 대학교 OT조 친구들 모임이다. 한 OT조에 12명인가 15명이 있었고, 01학번 선배들은 4명 정도 배정되었다. 리조트인지 콘도인지에서 2박 3일 간 진탕 술을 마셨던 기억만 난다. 요즘 대학생들은 그렇게 술을 마시지 않는다던데... 우리 땐 왜 그랬지, 어쨌든 그땐 그랬다. (사실 우리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고 지금도 가끔 그렇다.) 그 OT조에서 처음 만나 20년이 된 지금까지 만나는 친구들은 나 포함 네 명이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음식점을 하던 K네에서 종종 만났는데, 코로나 때 결국 폐업을 했다. 그 친구의 폐업 이후 을지로에서 한번 만났다가 이번에는 늘 말로만 얘기하던 우리 학교 동네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이번에서야 실행했다.
1차는 낙지볶음을 먹고, 2차는 오랜만에 학교가 궁금해서 학교 정문까지 가 보았다. 나는 거의 10여 년 만에 학교 앞을 온 것 같았다. 유명한 떡볶이집은 그대로였다. 아직도 복사집 몇 군데와 중국집, 김밥천국, 카레집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지만 소모임, 학회 사람들과 즐겨 찾던 술집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학교 앞에는 보이지 않던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많이 생겼다. 학교 정문도 달라졌다. 달라진 학교 정문에서 졸업한 지 십수 년이 지난 마흔 살 네 명이서 셀카도 수줍게 찍어보았다. "이야... 나 정문 옆 저 작은 공원에서 술 많이 마셨지~ 여기서 술 먹고 굴러서 바지가 온통 흙인 적도 있었어~"라고 말했더니 옆에서 Y가 시크하게 말한다. "요즘 대학생들 술 잘 안 마셔."
변한 듯 변하지 않은 학교 앞 길을 걸으며 서로 다른 얘기들을 했다. J는 돈은 없었지만 학교 다닐 때 참 행복했다고 말했다. 최근 회사 워크샵에서 심리검사를 했는데 책임감이 너무 높게 나왔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마침 지나던 가게가 예전엔 '바이더웨이'라는 편의점이 있던 곳이었다. 나는 신입생 때 돈이 참 없었는데 '바이더웨이' 편의점에 있는 현금인출기에서 7천원이 남은 은행잔고에 3천원을 더 넣어서 만원을 만들어 현금을 뽑은 게 부지기수였다고 얘기해 주었다. 나도 대학생 시절에 행복했지만 그래도 안정적인 지금이 난 더 좋다고 말했다.
넷이서 타박타박 학교 앞을 아주 오랜만에 걸으니 기분이 묘했다. 갑자기 다들 말수가 많이 없어졌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얼굴들이 너무 앳되어 보인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내가 그들보다 많이 늙어서이기도 하지만, 뭔가 우리가 스무살 시절의 젊은 얼굴과 지금 이십대들의 얼굴과 패션이 많이 다르기 때문인 것도 같았다.
내가 대학 4학년 때 살 빼겠다고 열심히 다니던 헬스장 건물이 그대로 있었다. Y가 말했다. "이거 우리 학교 다닐 땐 신축이었는데 이제는 꽤 낡은 건물이 되었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이 건물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는 한창 인기 좋은 회사에서 여름 인턴을 하던 시절이었다. 야망도 크고, 꿈도 야무졌다. 광고 촬영장도 가보고 다양한 경험들을 하면서 매일매일 날아갈 것 같은 나날들이었다. 지금은 회사와 육아에 찌들어 거울을 볼 때마다 눈밑 지방재배치 수술을 매일 걱정하는 마흔이 되었다. 꿈도 야망도 재처럼 사그라졌다. 지난 20년 간 난 무엇을 했을까. 대학 친구들과 이제 20년 지기가 되었는데... 20년이면 한 아이가 태어나서 대학에 입학할 세월인데 그간 나는 무엇을 했나. 지나간 그 긴긴 세월이 후회스럽고 기분이 울적해졌다. 친구들도 이 날 내 얼굴을 보고 얼굴이 많이 안 좋아졌다고 했는데... 친구들아, 그냥 난 얼굴에 살이 많이 빠졌고 뱃살은 그대로 나와있고 눈밑이 거뭇하게 꺼졌을 뿐이란다. 나 건강검진 결과도 건강해...
골목길 사이에 우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있던 작은 맥주집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2차를 이곳으로 정하고 바로 들어갔다. 낯설다. 흠칫, 작은 가게였는데 맥주가 한 병에 만육천원씩 한다. 생각해 보니 학교 다닐 때 그냥 간판만 본 것 같다.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가게였다. Y가 말하길 여긴 대학원생이나 오던 가게였단다. 다들 맥주를 고르고 나는 글렌피딕 위스키 언더락 한잔을 주문했다. 이제 몸 생각하면서 내일 숙취 없는 비즈니스 술을 한잔 해야지 않겠냐고 농담 삼아 얘기했다가 자연스레 화제는 회사 이야기로 이어졌다. 한 회사에서 십 수년간 소처럼 미친 듯이 일하는 Y에게 몇 년 동안 이직을 권했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지금은 조금 후회스럽다고 하는 Y를 놀리는 재미가 꽤나 쏠쏠했다.
아무리 다들 돈 버는 친구들이라지만 한병에 만육천원 하는 맥주는 부담스러웠다. 원래는 가정이 있으니 다들 9시에 집에 가자고 했는데 아쉬워 3차를 청했다. 소주도 팔고 맥주도 팔고 노가리, 먹태도 파는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5월의 청량한 밤공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길가 옆 오픈된 테이블에 앉았다. 이 친구들이랑은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는데도 참 재미있다. 그럴 수밖에, 20여 년 전 우리 대학 시절의 추억은 과거라 변하지 않으니깐. 왁자지껄 떠들고 웃었다. 마치 우리가 대학생이 다시 된 것처럼 깔깔거렸다.
마냥 좋은 일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K는 중간에 자퇴를 했다. 자유분방하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았던 친구라 자퇴한 줄 알았는데, 이 날 술자리에서 처음 알았다. 엄마네 가게에 불이 났다고 했다. 주변 가게들로부터 피해 보상 요구가 들어왔고,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고 했다. 그냥 이 녀석은 원래 이것저것 자기 사업이 하고 싶었던 친구인 줄 알았다. 그런데 본인의 장점을 어필하여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었다는 꿈이 있었다는 건 지난 20여 년간 까마득히 몰랐다. 그간 내가 몰랐다는 게 마음이 저리고 먹먹했다. 나도, K도, J도, Y도 지난 시간 동안 이런저런 좋고 나쁜 일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다들 그럭저럭 잘 살아서 다행이다. J가 고시공부를 하던 힘든 시절 "나는 엄마 아빠의 기생충이야~!"라고 술에 취해 울었던 에피소드를 우린 늘 웃으면서 놀리는데, 이제 J에겐 신도시 상가가 있다.(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나오기도 10년전일거다 아마도) 우리는 또 J를 능력 있는 여자라고 늘 놀리는 거 반으로 추켜세워준다. 물론, 그 상가에 잔뜩 낀 대출을 우리가 모르는 건 아니다.
대학 시절과 다른 건, 이제는 먹고 싶은 걸 돈 걱정 없이 주문했다는 거다. J가 배는 부른데 타코야끼가 먹고 싶다고 했다. K가 뭐가 문제냐고 다 시키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배가 부른데도 타코야끼도 시키고, 골뱅이탕도 시키고, 노가리도 시키고, 먹태도 시켰다. Y가 대학시절 언젠가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치킨집을 갔는데 아무도 돈이 없었댄다. 고민하다가 결국 소주에 치킨무만 시키면 안되냐고 주인장한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는데, 다행히 그 가게에도 학교 선배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서 치킨 한 마리가 나왔다고 했다.
막판엔 술집 건너 있던 인생네컷 사진도 찍었다. 술도 올랐고 어떻게 찍는 줄도 몰라서 똑같은 사진만 6장이 출력되었다. 예전에 한창 찍던 스티커 사진 기계랑 다른건가? 인생네컷 조차 하나 제대로 못 찍는 걸 보니 우리가 진짜 마흔인가 싶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자정이 다 되었다. 연애시절보다는 훨씬 덜하지만 여전히 꽤나 자상한 내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시댁에 갔다가 아이를 말꼼히 씻기고 나를 데리러 왔다. 남편차에 타서 카시트에서 자고 있는 아가와 운전석의 남편을 번갈아 바라보니 다시금 20년이 지난 현실이다. 현실은 차분하고 고요했다. 당장 내일 아침 일찍부터 우리 아이는 나를 흔들어 깨울텐데 일어나기 힘들 내 체력부터 걱정이 되었다. 다음주 월요일 기획서 보고 때문에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스물스물 생각이 났다. 이젠 먹고 싶은 술과 안주를 마음껏 시켜 먹을 순 있지만, 몸도 마음도 어깨도 무거워진 마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