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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e Jun 02. 2021

새로운 시작과 아픔의 끝

 

0. 미루고 미뤘던 옷정리와, 싱크대 대청소와, 정리정돈, 설거지 등등을 한다. 집안일은 왜 해도해도 계속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대강 중요한 것들은 마무리하는 중이다.

정신없이 굴러왔던 지난 4개월, 태풍이 쓸고 지나간 후 추스리진 못하고 버티기만 했던 5월이었다. 토요일 하루를 푹 몰아 자고 배달음식을 잔뜩 시켜먹고 요가를 엄청 하니까 기력이 좀 돋는 것 같다. 그래, 이게 나지. 그때그때 변덕 따라 하루의 일정을 정하지만 온전히 내 리듬에 충실한 날을 확보하며 어느정도 추슬러진 게 느껴진다.


옷장 정리를 하고 습기 흡입제를 바꾸다가 몇년 전 일기장을 발견했다. 좀 열어 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막막해하며 열심히 살았던 내가 있다. 지금 일어난 고난을 가장 쉽게 이겨내는 마음 가짐은, “전에도 이랬었어” 라는 마인드라 했던가.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살린다.


사실 마음 속으로 이번 고비들도 넘겨낼 것임을 알았으나 녹록치 않아 지쳤던 날들이었다. 그때보단 조금 덜 막막하고, 조금 더 빠른 회복이 가능한 이유는 그때 그시절 한결같이 한계에 도전해왔기 때문인것 같다. 여의치 않게 지난 한 달은 무기력에 쌓여 지냈으나 너무 나 자신에게 박하게 대하지 않으려고 한다. 인간적으로 그 많은 일을 다 겪고, 일단 성공적으로 마무라를 했다 해도 후유증이 없을 수는 없는 거니까. 이제부터 또 마음을 잡고 빠르게 나아가면 되는 거겠지.



1. 몇주 전 피터가 부암동에서 열었던 전시에 갔다. 어쩜 그렇게 자신의 자리에서 확고하게 필모그래피를 착실히 쌓아갈 수 있는지, 가만 보면 제일 꾸준하게 포트폴리오를 잘 쌓는다. 인섭오빠가 오기 전에 오랜만에 둘이서 이야기를 하다가, 이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털어놨다. 예전에 우리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라고 말했을때 워낙에 generous한 그는 남의 험담을 싫어하는 성격에 나이가 들수록 그런 가치가 중요해지는 건 맞는거 같아 지수야, 라고 말했고 나도 그건 맞지, 라고 황급히 말했으나 사실 정말 털어놓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


가정이나 재태크 등 자신의 기반을 탄탄하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고민을 그만두는 것은 전혀 다른 이슈니까.



2. 요새 내 최고 고민은 내가 Window of Life를 남들보다 빨리 넘을 수록 내가 아꼈던 사람들이 떨어져 나간다는 거다. 계속해서 같이 나아가줬으면 했으나 각자의 이유로 지금의 자리에서 조금 더 머무르는 사람, 앞으로 삶에서 변할게 없어서 주식이나 재태크나 코인, 결혼이 유일한 관심사가 된 사람, 내가 함께했던 반짝반짝함을 찾기 어려워진 사람이 많다. 난 가끔씩 이사람들이 적금 몇천만원 모으는 것 보다 차라리 돈을 잘 쓰고 더 잘 놀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차라리 투자에 엄청 뜻이 있어서 그걸 열심히하거나, 할게 없어서 유희로써 연애하고 자본주의는 눈 앞에 있으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저금이나 투자나 하면서 이렇게 보내기에는 이사람들이 가진 자질이 너무 아깝지 않나 라는 주제넘은 생각을 종종 한다. 내가 변한건지 그사람들이 변한건지 모르겠다.


나보다 4-5년정도 사회 선배인 언니들을 만나면 요새 항상 이런 걸 물어본다. 샘나언니에게 상담을 했다. 언니도 요새 친구들을 만나면서 제일 충격받았던 게 어느 순간부터 인생에서 변할게 별로 없으니까 서로 하는 이야기가 결혼, 연애, 투자, 코인으로 수렴한다고 했다. 더이상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과 일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난 언니의 이야기를 잠잠히 들으면서 누구보다 멋진 대기업 커리어를 쌓다가, 원하는 길로 야심차게 커리어를 전환한 그녀가 내 앞에서 내 고민을 들어줘서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고민을 고민으로 방치해두지 않고 함께 그 고민을 깊어지게 할수 있어 감사한 순간이었다.



3. 백예린의 노래 가사 중 “그러니 우린 손을 잡아야 해 / 끊임없이 눈을 맞춰야 해 / 가끔은 너무 익숙해져 버린 서로를 잃지 않도록” 이라는 노래가사를 들을 때마다 난 마음이 찡하다. 주위 언니오빠들이 너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미련가지지 말라며 넌 참 정이 많다고 타박해도 난 마지막 순간, 혹은 마지막 순간이 끝난 그 이후까지도 내 사람이었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미련을 가질 것을 알고 있다. 나아가면서 사람을 잃을 때마다, 혹은 부딪힐 때마다 난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고 나를 살아가게 하는 나아감을 결국 선택하면서도 그 선택에 대한 죄책감 아닌 죄책감이 계속 들었다. 아쉬웠고 상실감이 드는 마음을 부여잡고 그렇게 계속 갔던 것 같다. 예전의 나를 돌아보며 안쓰러워 하곤 했는데 최근의 실연 등등을 거치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난 변한게 별로 없는 것 같다.


난 항상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려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의 연이라는게 늘 그렇듯 내 마음과 의지만으로는 안 되더라.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늘 오늘에 충실한 것밖에 없었다. 아끼는 이들을 잃은 만큼 주위에 서 있는 사람에게 더 잘해주고 싶고 새로 나에게 와준 사람들이 감사하고 그렇다.



4. 소정언니는 최근 아끼는 사람을 잃고 심장에 칼 박힌 시간을 살고 있던 나에게 “네가 계속 나아가야 해서, 그 사람이 떨어져 나간 거야” 라고 했다. 우리는 아직 20대고, 뒤를 돌아보며 주저앉을 나이는 절대 아니라고. 나아가야 할 시간이 앞으로 무궁무진하게 남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나이가 들수록 나아가는 사람이 많이 없어진다고. 너는 그렇게 생각해봤을때 지금 잘 하고 있는 거다, 너는 절대로 멈추거나 주저앉거나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고, 언젠가 우리도 시간이 지나 뒤를 돌아볼 때가 오면 그때 가서 엇갈려버린 사람들을 다시 만날수도 있을 거야, 라고


내가 직면해야 할 사실이자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잔인하지도 위로되지도 않는 딱 그만큼의 현실이었다. 이젠 인생에서 서로의 길이 갈린거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이 결과는 계속해서 거침없이 나의 길을 걸어온 내 선택의 결과이기도 했다.


가끔씩은 지금보다 미숙하고 원하는 것만 많고 가진건 하나도 없어서 힘들었지만 그시절 그사람들과 뜨겁게 고민했던 시절이 그립다. 난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데 이제는 혼자가 되었다는게 쓸쓸한 마음이 들때가 점점 많아 진다. 그런데 인생의 또 한 고비를 넘고 어느정도 성장하고 나니, 이제는 그저 안타까워 하기보다는 쓸쓸함을 긍정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내 이런 교훈을 얻은 지금까지 미련에 헤메이는 나를 답답해하면서도 위로해준, 늘 그자리에 있어준 분들께 감사하고 동시에 아파하고 또 아파하면서도 회피하지 않고 결국 홀로 우뚝 선 나 스스로가 대견하다. 당신과 함께 성장기를 보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 글을 변함없이 옆에서 함께 나아가주는 샘나언니 소정언니에게 바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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