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느리게 살고 있습니다.

슬로 라이프를 배우는 중

by 미스킴라일락

오전 11시 진료가 있는 날이면 새벽부터 서둘러야 한다. 적어도 진료 1시간 반에서 2시간 전에는 채혈이 완료되어야 진료가 가능해서 늦어도 병원에 9시 반까지는 도착해야만 한다. 내가 사는 곳에서 서울에 위치한 병원까지의 이동시간과 아침식사 시간을 계산하면(식사를 해야만 혈액수치 조건이 맞춰지므로) 적어도 집에서 6시 15분에 출발해야 시간이 맞다. 출근할 때도 이렇게 일찍 나온 적이 없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환자가 된 후 오히려 새벽차 탈 일이 많아졌다.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해 서울 강남터미널에 내려 아침을 해결하고 다시 지하철에 몸을 실으면 강남 일대를 벗어나기까지는 그야말로 출근길 지옥철 체험시간이다. 정말 피하고 싶지만 진료 시간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가 않으니 싫어도 별수 없다. 사실 4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 타던 지하철이라 놀랍지는 않지만 지금도 여기서 빠져나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백번 천 번 들 만큼 러시아워의 지하철은 인상이 찌푸려진다.

30여분을 이동해 드디어 병원에 도착하면 잠시도 쉴 틈 없이 곧장 일사천리로 기본 순서를 밟는다. 채혈실로 들어가 접수를 하고 순서에 따라 채혈을 마친 후 다시 빠른 걸음으로 종양내과 접수대를 거쳐 키, 몸무게, 혈압을 다 측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한 숨 돌리는 시간이다. 진료시간까지는 1시간 내외의 대기시간이 있어 이때 사람들이 좀 뜸한 곳을 찾아가 잠깐 쉬면 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뜸한 곳이 이 큰 병원에 좀처럼 잘 없어 대기시간이 마냥 편하지는 않다.

기다림의 시간이 무색할 만큼 의사의 간결하고 짧은 진료가 끝나면 항암주사 차례를 기다리며 다시 한 시간 가량의 시간을 또 대기한다. 암 주사실에도 사람은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1층보다는 덜 하기에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시간을 보내면 이윽고 전광판에 내가 입실할 병실이 안내된다. 그곳에서 간호사가 거무튀튀하게 변한 내 손등의 혈관에 주삿바늘이 꽂고 30여분 동안 약물이 투여되면 그렇게 드디어 오늘의 목적인 항암치료가 끝난다.


일정을 마치고 병원을 나서면 한창 오후의 해가 비추이고 있다. 갈 때와 동일한 교통편으로 이동을 반복해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 5시가량이다. 이렇게 하면 새벽부터 시작된 일정이 모두 끝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이 일정은 벌써 2년째 반복되고 있다. 컨디션이 나빠도 치료를 중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꼭 가야 하고 때로는 (백혈구 촉진제만 맞고 집에 돌아갔다가) 이틀 동안 컨디션을 끌어올려 다시 가야 할 때도 있어 주 2회를 방문할 때도 있는터라 사실 만만치는 않은 일정이다. 그나마 집이 부산이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할 따름이다.

4년 전 어느 날, 아직 젊은 나이에 뜻밖에도 유방암이 발견됐다. 1기로 발견이 되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2년 만에 암은 폐로 전이가 되었다.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4기 유방암 환자는 완치를 목적으로 치료를 받는 것이 결코 아니란다. 단지 수명연장의 의미기에 내가 버틸 수 있는 한 최대한 오랫동안 받게 된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내가 잘 버티고 있는 중이다.


병원을 다녀오는 일정은 하루가 이렇게 빡빡하게 흘러가지만 그 외의 하루는 아주 자유로운 편이다. 밤늦게까지 글을 쓰거나 유튜브를 시청하거나 책을 읽다 졸음이 몰려오면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이 든다. 그리고 아침을 맞이한다. 가끔 새벽 5시경에 반려묘 초코가 귀에 대고 야옹야옹 울어대면 시끄러워 깨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더라도 일주일에 하루 이틀 가량은 일찍 일어나 활동을 개시하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일상은 실컷 늦잠을 자다 아홉 시가 넘어야 눈을 뜨는 지극히 느긋한 흐름이다. 그렇게 간신히 일어나 잠깐 간식을 먹고 짧은 운동으로 정신을 차린 후 본격적으로 아침식사 준비에 들어가는데 아침식사라기보다는 점심식사에 가깝다. 늘 식사를 마치고 나면 오후 12시가량이 되므로. 남은 시간은 5분 거리 도서관을 가기도 하고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지기도 하며 아주 여유롭게 보내는 편이다.


경제활동을 하지도, 돌봐야 할 자녀가 있지도, 내가 해야만 하는 의무나 책임이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외롭다거나 심심하지는 않다. 혼자만의 시간을 나름 퍽이나 즐기는 사람이라 오히려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편이다. 사회활동을 하지 않다 보니 외출이 줄어 예전처럼 때때마다 옷을 사는 일도 줄었고 머리카락이 짧으니(혹은 없으니) 머리손질을 하는 시간과 비용도 많이 줄었다. 중증 결정장애로 2주 내내 새벽까지 온라인 쇼핑몰을 전전긍긍하며 물건을 고르지 못해 방황 및 갈등하는 일도 이젠 옛날이야기. 원래 곱슬머리에 곰손이라 매일 아침 머리손질에만도 많은 시간을 들였는데 이젠 그럴 일도 없어져 한편으론 참 편리하다. 물론 남자들보다 더 짧은 머리카락이 사뭇 아쉬울 때는 있지만 암환자 생활 4년이 되니 여성스러운 외모에 대한 욕심도 다 내려놓게 되어 그마저도 점점 무뎌져 간다.

차림새가 간결해진 만큼 물건도 줄고 그와 더불어 소유물을 정리하는 장소의 면적도, 정리의 시간도 덩달아 축소되어 덕분에 여러모로 간소해졌다. 그렇게 나는 참 미니멀화된 삶을 살고 있고 자연스레 느긋하고 느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곤 하는데 그때그때 '나'에게 주어진 때를 충실하게 사는 것. 그것이 아닐까 싶다. 그 전에는 배우지 못한 것이다. 나보다는 다른 사람에 나를 맞추며 살기 급급했기에 게을러 보이는 모습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늘 무언가에 쫒기듯 달리게 했던 불안을 덜어내 버리고 나를 닥달해대던 마음의 조급함도 늦추며 운명의 리듬에 나를 맡기고 사는 법. 나는 이것을 이 시간 배우고 있다. 그리고 배운 대로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속도에 맞춰 부지런히 살기로 했다. 나만의 속도로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도록 느리게 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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