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때론 버티기
2014년 12월 31일 밤이었다. 정확히는 자정을 2시간 앞둔 시간이었다. 한 지인이 연락이 와서 지금 참석하고 있는 모임에 음성으로 나를 연결시켜줬다. 원래라면 내가 갔어야 하는 중요한 모임이었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모임 현장의 분위기는 연말의 흥분과 기쁨, 그리고 놀라움과 새로운 희망으로 뒤엉켜 혼통 웃음소리와 환호, 박수가 넘쳐났다. 이 날은 어디라도 저마다의 분위기로 다 그랬을 것이다. TV 속 화면에도 온통 축제의 장면들만 넘쳐났다.
나는 방에 혼자 누워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맞은 항암제의 여파로 앉아서 몸을 가누는 것도 힘들어 하루 종일 누워있는 중이었다. 세상과 나는 완전히 분리되어있는 느낌이었고 그 이질감은 너무나도 생경했다. 나 혼자 이 시간에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듯 그들의 분위기가 너무 멀게 느껴지는 이상한 이질감. 하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단,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새해를 맞이하는 첫 시간의 카운트 다운을 하는 순간, 꼭 저들처럼 같이 카운트를 하며 요란스럽게 맞이하지 않으면 괜히 나 혼자 새로운 해를 맞이하지 못하고 이 해에 갇혀버릴 것 같은 고립감이었다.
매해의 연말연시가 그러하듯 이 날도 다가오는 해가 어떤 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새해가 오면 뭔가 정말 특별한 해가 될 것이라는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저마다의 바람을 염원하고 그에 따라 나도 그 첫 시간을 당연히 그같이 맞이하는 게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이었는데. 갑자기 거기서 튕겨 쳐 나와버린 낯선 느낌. 그게 참 싫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고 나의 현실은 환자 버전의 지루한 일상이 한없이 느린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어제와 전혀 다르지 않았고 분명 내일도 그러하리라.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상실감이었던 것 같다. 매해의 연말을 어김없이 누군가와 함께, 혹은 TV로라도 들뜬 마음으로 카운트 다운을 하며 보냈던 시간들을 처음으로 잃어 본 상실감 말이다.
그렇게 괜스레 우울스러운 분위기를 타려는 찰나, 생각했다. 이 순간, 나만큼은 이 세상에서 제일 평범한 시간으로 보내겠다고. 시끌벅적한 세상을 무시하고 스스로 고립을 택했다. 이까짓 신년 카운트 다운이 무슨 대수라고. 그래, 12월 31일 자정을 좀 지루하게 보내면 어떠리.
괜한 분위기 따윈 집어던지고 모든 외부의 소식을 잠시 꺼버리자 주위가 조용해지면서 이윽고 무덤덤해졌다. 약기운에 취해 몸도 졸려왔다. 카운트 다운을 하려면 아직 한참을 더 있어야 하지만 불을 끄고 이불을 덮고 조용히 잠을 청했다. 세상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어제와 똑같이.
그 순간, 마음에는 알 수 없는 평온함이 나를 가득 감쌌다. 모든 세상이 다 설레어하며 맞이하는 한 해의 가장 특별한 시간을 세상에서 나 혼자 가장 평범하게 맞이하는 것. 이것이 새로운 나만의 새해맞이 의식이 됐다. 모두가 특별함을 노래할 때 평범함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도 참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때론 평범하고 보통스러운 것이 가장 특별한 것이 된다. 그것들만이 주는 평안의 힘이 있으니 말이다.
한동안 포털 사이트 메인에 이 말이 유행어처럼 떠있었다. 안 그래도 유명한데 말까지 시원하게 잘해 더 좋아하는 걸 크러쉬 이효리가 한 말.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
촬영 중 길거리를 지나가다 마주하게 된 어린 학생에게 출연진 중 한 명이 인사치레로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며 건넨 말을 이효리가 맞받아치며 한 말이다. 그래. 우린 왜 이다음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며 괜한 소리로 자라나는 꿈나무들을 옥죄었단 말인가. 좀 아무나 되면 어때서.
사실 나는 늘 초조했다. 내 존재에 대해 정의하라면 나는 한 마디로 ‘우주의 먼지’였다. 그래서 늘 신 앞에서 ‘우주의 먼지’ 같은 인생임을 고백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살아온 날들이 바람에 흩어지는 먼지처럼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끝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런 나의 하찮음이 사람들 앞에 드러날까 부끄러웠고 그렇게 내 인생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채 묻혀버릴까 때론 두려웠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들을 훗날 곰곰이 생각하면 그것들은 역으로 일종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였다.
그리고 투병이 시작되었고 혼자만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는사이 이제는 생각이 좀 바뀌었다. 나는 그냥 ‘아무나’가 되기로 했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모호한 기준에 맞추지 못한 자신을 괜히 자학할 이유가 있냐 말이다. 그런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산다는 건 슬픈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살게 되는 삶에서 또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이번에는 그들 눈에는 얼마든지 ‘아무나’가 되기로 용감하게 마음먹었다. 그런다고 해서 내 인생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요,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에서 나를 자유롭게 만들고 소리 없이 내 인생을 근사하게 만들고 싶다. 친구들 앞에서는 같이 놀 거 다 놀아가며 시험공부 못 했다며 울상을 지어놓고 뒤에서는 코피 쏟아가며 공부해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얌체 공붓벌레같이 말이다.
지금 가까이 있는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을 예측하건대 이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매일 가다시피 하는 도서관에서는 동네 백수, 좀 친분 있다 싶은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4기 암환자, 그리고 어른들 눈에는 노처녀.
그런 시선이 불편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피하지는 않고 싶다. 대신 아주 보란 듯이 그런 모습으로 대놓고 망가져 보이고서는 뒤에서 어쭈? 요것 봐라? 할 소리 나오게 얌체같이 뭔가가 되어 있어 보기가 지금의 내 계획되신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사람들 앞에서는 있는대로 아무나가 되어버리고 뒤에서 혼자, 세상 몰래 재밌는 미래를 만들어보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엉뚱하지만 이것이 현재 나를 남의 시선에 좌지우지하지 않게 귀를 막은 채 나의 길을 찾고 그 길을 꾸준히 가게 하는 요망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인생은 때론 버티기다. 무엇인가 이루어지려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들어가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런 ‘버티기의 시간’ 동안 나를 버티게 하는 건 어쩌면 꿈이 아니다. 지금 세상으로부터 ‘아무나’로 불려도 요동하지 않는 묵직한 멘탈 아닐까.
보통의 시간 아니, 낙오자로의 시간일지라도 버티는 거다. 부지런히 오늘의 씨앗을 뿌리면서 말이다. 그 씨앗이 커서 잎이 피고 꽃이 펴 열매 맺기까지 쉬지 않고 달리기 위해 지금 이 겨울의 계절을 일단 잘 버텨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