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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킴라일락 Apr 19. 2019

이런 생일도 있었다네

잊지 못할 생일날을 선물 받았다

 마침 이 지역에서 근무하고 있는 절친 P양이 점심시간에 잠시 들려서 같이 밥을 먹어주겠단다. 농담으로 병원밥이 맛있으니 밥 먹으러 오라고 한 말에 시원스럽게 그러겠노라고 대답을 하더니 정말 온단다. 그러나 이내 걱정이 되었다. 그녀의 근무지에서 이 병원까지는 25분 거리나 되는데 과연 잘하는 짓인지. 병원은 완전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시 말을 해도 10분 만에 정말 밥만 먹고 일어나야 할 텐데 미안하게 굳이 점심때 오겠단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잘 됐다 싶어 기왕이면 오는 길에 에세이책을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12시 30분. 로비로 마중을 나갔다. 뭔가 주렁주렁 양 손 가득 들고 씩씩한 걸음으로 1층에 도착한  P양. 요양병원은 그녀도 처음이라(이 나이에 요양병원이 낯선 건 환자뿐만이 아니다. 문병오는 또래들도 낯설긴 매 한가지) 여기저기 둘러보며 신기한지 한마디 했다.

 "간호사들도 있네?"

이 친구야. 여기 병원이다.

 "그럼. 의사도 있는 걸."

한 마디 해주니 놀라며 말했다.

 "아... 여기도 병원이구나."

갑자기 이 녀석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부끄럽다. 누가 듣기 전에 얼른 병실로 데리고 들어왔다.


병실로 들어와 작은 탁자 위에 빨간 케이크 박스를 올려놓으며 P양이 말했다.

"여기 진짜 맛있는 집이야. 혼자 다 먹고 인증샷 보내."

당신이 안 맛있는 게 있었던가요?

나눠먹겠다고 하니 꼭 혼자 다 먹으라고 성화를 낸다.

 P양은 내 병실을 잠시 둘러본 후 자기도 입원해야 한다며 잠깐 침대에 드러누웠다. 늘 바쁘고 피곤해하는 걸 알고 있어서 정말 쉬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와 마주 앉아 병원식을 10분 만에 후루룩 먹어치우고는 급히 다시 길을 나섰다. 안녕, 잘 가. 고마워.


 그녀가 떠난 빈자리에는 빨간 케이크 박스와 책 다섯 권, 그리고 회사 쿠폰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답한 하얀 봉투가 놓여있었다. 먼저 케이크를 꺼내보았다. 과일이 올려진 생크림 케이크다. 요 며칠 갑자기 생크림이 먹고 싶어 병원에 들어올 때 휘핑크림을 한 통 사서 들어왔는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생크림 케이크를 사 온 이 기특한 녀석 좀 보게. 진정 기뻤다.  

 그리고 내가 부탁한 에세이 서적 대신 온 경영 관련 서적들. 혹시 이 녀석, '에세이'의 뜻을 모르는 건가? 집중이 힘들어 머리 아픈 어려운 글은 읽을 수가 없는데 역시나 내 예상대로 책에는 용어도 낯선 경영 전문 용어들이 내 눈을 공격하고 들어왔다. 바로 덮어버렸다. 이 책들은 병실 인테리어용으로 써야겠다.

 사실 예전에 함께 제주도 여행 갔을 때 내가 이다음에 기회가 되면 창업을 하고 싶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내가 좋아할 거 같다며 일부러 챙겨 온 책들이었다. 그 마음만 받기로 해야겠다.

 다음. 오랜만에 P양 회사 온라인 쇼핑몰에 가서 쇼핑을 해야겠다며 감사한 마음으로 쿠폰 봉투를 열었다. 그러나 봉투 안에는 깜찍한 사랑고백과 함께 쿠폰 대신 노오란 지폐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 녀석이. 요즘 사랑 고백은 돈으로 하나보다.

  밖은 비가 와서 잔뜩 흐린 오후였다. 가만히 케이크에 초를 꽂아 불을 붙여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아무 감흥도 재미도 없었다. 그래도 사다준 정성을 생각해 인증샷을 남기고는 혼자 생크림 케이크를 먹었다. 그렇게 맛있는지는 모르겠다. 내 입에 감각이 무뎌서인지도.



 

 가위에 눌렸다. 평생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드문 경험인데 하필이면 병원에서. 이번에는 간호사가 약물을 투여하자 곧바로 목이 졸려왔다. 약물을 멈춰달라고 주먹으로 간호사를 두드리며 필사적인 몸부림을 쳤는데 그 무뚝뚝한 남자 간호사는 모른 척하고 계속 투여했다. 곁에는 문병 온 지인도 함께 있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나,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고 그냥 이쯤에서 모든 걸 포기하자며 체념하는 순간, 스르르 잠에서 깼다. 아침이었다. 꿈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왠지 서러움이 밀려왔다. 내가 분명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만 하라고 했는데. 고통스럽던 생생한 목졸림보다 다들 나를, 내 필사적인 몸부림을 모른 척 했던 상황이 너무 슬프고 무서웠다.  

 



 배식 아주머니께서 병실 문을 드르륵 열고 "식사 왔습니다"하며 아침 인사를 하셨다. 식판을 받아 샐러드와 고구마, 달걀, 사과만 집어 들고 자리로 왔다. 나머지 밥은 남겨뒀다가 점심으로 먹는다. 아침은 이걸로 충분하니까. 하루에 정식 밥으로 세끼는 도저히 못 먹는다.

 샐러드 접시를 침대 위 보조 테이블에 옮기다가 손이 살짝 미끄러졌다. 순간 접시 뚜껑과 접시가 어긋나면서 손에서 놓쳤다. 이런. 침대 이불 위와 바닥에 블루베리와 양상추들이 보라색 물을 흩뿌리며 신나게 엎어졌다. 나 오늘 생일인데. 이게 뭐야, 아침부터. 후...

  정리할 엄두도 못 내고 한참동안 바닥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나... 생일빵 했구나. 크크크크크'

 그렇게 기억에 남을 만한 자축 생일빵을 하고는 휴지로 깨끗이 닦아냈다. 마음이 다시 즐거워졌다.

 

 매해의 생일날이 워낙 별 볼일 없어서 딱히 기억에 남는 생일도 없다. 내일모레 마흔이나 먹게 살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요번 생일은 아무래도 평생 기억에 남을 각이다. 가식과 형식으로 생일치레를 해주는 무의미한 축하자리 보다야 이렇게 혼자 난리부르스를 추더라도 기억에 남는 생일날이라니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 괜히 우울해하지 않기로 한다. 우울하게 생각하면 가뜩이나 오늘 내일 하는 얼굴에 주름만 하나 더 늘 뿐이니.

그렇게 때 아닌 경영서적과 가위눌림, 그리고 생일빵과 함께 나의 올해 생일이 요양병원에서 요란스럽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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