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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킴라일락 May 03. 2019

저도 제 이야기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정말...

꼭 저렇게 큰 소리로 통화를 해야 할까?'

 조용히 가서 "저기... 죄송하지만 통화 좀 작게 해 주시면 어떨까요?"라고 웃는 얼굴로 용감하게 한 마디 하고 싶지만 소심한 성격이라, 나 말고는 딱히 거슬려하지도 않는 분위기라 꾸욱 참으며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운동 프로그램 시간만 되면 늘 혼자 나와 큰 소리로 통화를 하는 그는 이 병동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는 남자 환자 중 한 명 되신다. 게다가 흥부자라 우리 병동에서 '혼자 노래하고 다니는 남자'내지는 '노래 못 하면서 계속 노래 부르고 다니는 남자'로 누군가에게 인식되어 있는, 자기만의 색깔이 확실한 분이다.

 그런 그는  매일 아침이면 그렇게 누군가와 늘 큰 소리로 통화를 하며 운동인지 업무인지 모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나도 조용한 산책로에서 마주칠 때마다 뜻하지 않게 남의 전화통화 소리를 다 엿듣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면 비즈니스가 바쁜 듯 했다. 그도 병원에서나 환자지 밖에서는 분명 자기 위치가 있었을 테니 여전히 이곳에서도 업무를 연장하고 있을 수도.

 

 그날도 다 함께 준비체조를 마친 후 명상 시간에 돌입하고 있었는데 그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렸다. 그런데 오늘의 주제는 조금 다른 듯 하다. 비즈니스라기보다는 개인 사담 같은 분위기.

 오늘은 병원 생활의 불만에 대해 토로하고 있는 듯 했다. 병원 시설이 어떻네, 식단이 어떻네 등등의 말에 그렇구나, 그게 불만이구나 하며 그의 이야기를 강제 입력당하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나도 내 이야기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라. 그러고 보니 통화 내내 '대화'를 했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발산'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엄마에게 쫑알쫑알 고자질을 하며 응석을 부리는 남자아이 같은 느낌이랄까. 내 병실은 간호 데스크 바로 앞인 데다 병실 문 바로 옆엔 공용 벤치가 있는 '만남의 광장'터라 병실 안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웬만한 병원 돌아가는 이야기는 다 알 수 있을 정도인데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은 일이 거의 없어서 그가 같은 층에 있는 환자인지도 한참 후에나 알았다. 그렇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하루 종일 꾹 참고 있다가 이 시간만 되면 방언처럼 터지셨던 것이다.


 그래, 학교를 마치고 오면 서로 자기가 먼저 말하려고 손을 들어대며 엄마에게 달려드는 초등학생 조카들만 봐도 할 말이 그리 많은데 하물며 인생 좀 살아온 사람들이 오죽하랴.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암병동에 입원한 남자는 더 할 말이 많다.         

 몸이 꽤나 많이 아파진다는 건, 그리고 병원에 장기간 입원을 하게 된다는 건 그렇지 않아도 할 말 많은 인생에 그동안 하지 않던 종류의 이야기가 하나 더 축적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온 모두는 겉으로 표를 내지 않아도 할 말이 많아질 수밖에. 다들 그 많은 이야기를 어떻게 하며 살고 있는 걸까.

   

 예전에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기나긴 이야기가 다 끝나고 말은 내가 다 했는데 돈은 왜 내가 내냐는 할아버지에게 상담사가

 "할아버지. 살면서 누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할아버지 이야기 들어주신 분 계신가요?" 하자 할아버지가 그러고 보니 없었다며 수긍하셨다는 귀여운 이야기. 이야기를 들어줄, 그것도 별 중요하지도 않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무료로 잘'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건 사실, 참 고마워할 일이었다. 그 중요하지도 않은 내 이야기를 수긍해주고 귀 기울여주고 공감해 주며 자신의 시간을 내어준다는 것. 나를, 혹은 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힘든 일일테니 말이다.  

 

 예전에 나에게는 비공개 카페가 하나 있었다. 회원수는 나 한 명. 카테고리는 3개.

A 카테고리에는 직장에서 열불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분노의 타이핑으로 써내려간 얼굴 화끈한 속마음들이, B카테고리에는 왠지 마음이 쓸쓸해지면 써내려간 우울내 폴폴 나는 글들이, C 카테고리에는 그야말로 비밀글들이 모여 산다. 비밀글 소재는 비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에게 말하기는 미안하고(나는 반가운 사람 앉혀놓고 내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건 몰상식한 사람의 행동으로 생각하는 '교양 떠는 부류'임으로 솔직히 그 짓을 '못' 하는 것인지도) 넘쳐흐르는 억울함 내지 황당함과 깊어지는 상처들은 어딘가 쏟아내야겠고 그렇다고 어디 딱히 말할 곳은 없고, 딱 미치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었고 결과는 분노 표출 및 수다 욕구 해소용 등으로 아주 요긴하게 잘 써먹었다. 덤으로 타이핑 실력까지 늘었더랬다. (사람은 분노할 때 평소 불가능한 스피드를 낸다는 사실을 알았다.)


  암병동에 입원한 과묵한 아재도, 말단 초짜 어벙벙 신입도, 노는 게 제일 좋은 초딩도 모두 하나같이 할 말 많은 인생이다. 말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인지도. 그러니. 지금 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해도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체에 한 번쯤 마음 깊이 뜨겁게 행복해보길.


 누군가 자꾸 나더러 말 좀 하고 살라고 성화인데 입으로는 안 해도 손으로 이렇게 열심히 하고 사니 걱정 마시길. 봐라. 내 브런치 독자도 200명이나 된다.(세상에나. 200명이 어디니.) 이때까지 평생 내가 얼굴을 마주하며 사귄 사람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농담 아니다. 그들이, 그리고 또 새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다 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으니 나도 꽤나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글을 읽는, 읽은, 그리고 읽을 독자, 비독자 여러분들께 참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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