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킴라일락 Jul 09. 2019

어떤 일이 있어도 섭섭해하지 않겠습니다

  한방치료실은 금요일이라 한가했다. 한방 원장님은 환자들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셔서 침을 놓고도 한참 동안 옆에 서거나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주 주고받으시는 분이셨다. 치료실에는 경락 치료사분과 나, 한방원장님 셋뿐이라 나는 온몸 여기저기에 침을 꽂은 채 누워서 편하게 한 주 동안 있었던 일들, 평소 관심사 등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병원에 잠시 머물렀던 한 호스피스 단계의 중증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병원에서는 수익을 생각해 그런 환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지만 그는 반대하는 입장이라며 이런 말을 했다.

 "현재 병원 시스템으로는 절대 수용을 못 해요. 전에도 그런 분들이 좀 계셨어요.

몇 년 전에 나도 열여덟 살인 친구 보냈지. 꽃 보고 싶다고 해서 내가 운전해서 구경도 시켜줬는데. 그리고 며칠 뒤에 갑자기 떠났어요. 그게, 기억이 오래 남아요. 안 좋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 너무 우울하게 빠졌네.

자, 다시. 그래서 결론은 운전을 꼭 배우라는 거죠. 하하하하."

 나도 다시 따라 웃었지만 머릿속에서 이 말은 잊히지 않았다. 기억에 오래 남아 좋지 않다는 말. 이곳은 암환자들이 요양하는 병동이니 이곳에서 일하는 의사들은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하는 일이 그리 흔한 일도 아니겠지만 그리 드문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원장님은 어린 소녀의 임종에 대한 기억이 꽤나 오래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죽음에 그리 무뎌지지는 못하신 듯했다. 그런 이유와 입원해 있는 다른 환자들의 안정을 위해서도 한방원장님은 중증 단계에 있는 암환자의 입원은 반대를 하고 계신 입장이셨다. 물론 현재 병원 시스템상 무리라는 점도 이유였지만.


 며칠 전, 나를 비롯해 우리 병동 대부분의 환자들 모두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11시 너머부터 시작된 누군가의 비명으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야간 당직 간호사의 분주한 통화소리, 걱정하며 왔다 갔다 하는 환자들의 말소리와 발소리, 어두운 병실에서 혼자 듣고 있기에는 무서운 암울한 비명소리로 자정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새벽을 훌쩍 넘기고서야 다들 하나둘 잠이 들었고 나도 어느새 잠이 든 까닭에 더 이상의 비명을 듣지는 못 했다.

 나는 같은 층에서 두 병실을 사이에 두고 그녀의 비명을 들으며 혼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5년 가까이 암 투병하며 처음으로 들어본, 암성 통증에 의한 비명소리였다. 나는 다른 환자들처럼 그녀에게로 가서 상황을 살펴볼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다만, 어서 그녀의 통증이 줄어들기를 바라며 속으로 기도할 뿐이었다.

 다음날, 모르핀으로도 진정되지 않는 통증으로 밤새 온 병원을 울리던 암울한 비명소리를 내던 그녀는 일반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으로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간호사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이곳에서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으므로.


 암성 통증의 고통이 극심하다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온라인에서 암에 대한 정보를 캐다가 우연히 한 외과의사의 일기 같은 블로그 글을 읽었고 그곳에는 통증이 너무 고통스러워 자살을 지도한 어느 환자에 대한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런 까닭에 내가 폐전이 통보를 받고 가장 많이 염려한 것은 이제 그 일이 나에게도 생기는 일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도(어쩌면 '아직은'일지도) 그런 일을 겪지 않았고 그래서 암성 통증은 늘 남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날, 처음으로 간접적이나마 그 통증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되었고 충격은 꽤나 컸다.


 몇 주전 이곳에 잠시 다녀간 한 지인이 생각났다. 나와 같은 삼중음성 유방암을 치료 중인 그녀는 어느 날, 오랜만에 조심스레 나에게 본인의 상황을 알려왔다. 사실 올해 초부터 쇄골 쪽 뼈가 튀어나오기 시작해서 아예 서울을 떠나 더 철저하게 자연치료로 관리 중이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지금 너무 커져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뼈 전이였다. 그간 수술과 항암을 거부하고 레이저를 이용한 치료와 몇 년간 강도 높은 철저한 식이요법, 그리고 꾸준한 운동으로 자연치유를 하던 그녀였는데, 수년간 경과가 아주 좋아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뼈 전이라니. 3중 음성 유방암은 뇌와, 폐, 간, 뼈로 잘 전이가 된다고 알고는 있었고 나의 경우를 봤을 때 미리 절망할 필요는 없다고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말을 하곤 했지만 그녀의 소식을 들으며 느껴지는 예감은 그리 희망적이지는 못 했다.

 혼자서 간병을 할 수 없을 테니 일단 요양병원 입소를 권하며 큰 병원에 예약부터 잡아보라고 권했다.  통화가 끝난 그날, 그녀는 상담차 내가 있는 병원을 방문했고 그날 저녁 위층으로 입원을 했다. 아직은 통증이 없다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며칠 뒤. 그녀는 새벽 기차로 급히 서울을 갔다. 전날 밤, 갑자기 시작된 통증으로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하고 간호사를 호출해 진통제로 버티고 있다가 날이 세자 첫 차로 간 것이다. 통증이 시작되었다. 앞으로 진행될 통증의 크기를 모르는 그녀는 오히려 담담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다. 아니, 두려웠다. 함께 투병하던 가까운 지인이 수개월간 병원에서 의학적으로 다스릴 수 없는 통증을 견디다 임종을 맞이한 것을 이미 보았었다. 올해 초의 일이었다. 그런 사실이 떠오르면서 그녀에게는 차마 전할 수 없는 공포를 속으로 삭혀보았다. 통증의 의미는 나에게 통증 이상의 것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었지만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투병을 하면서 우리 환자들끼리는 서로서로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며 늘 "잘 될 거예요."라는 말을 많이 한다. 또 그래야 하고. 하지만 가만히 주변의 상황을 돌아보며 생각하게 되었다. 상황이 좋아졌을 경우에는 특별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다 좋게 풀릴테고 주변에서도 좋은 말들만 듣게 되고 좋은 얼굴로만 마주 보게 될 테니까.

그런데 좋은 면만 보고 싶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어쩌면 지금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며 일말의 준비라도 해야 하는 부분은 그 반대의 경우일 것이기에 바라보고 싶지 않은 반대면, 즉 '두려움'의 실체가 될 상황을 한번 가만히 열어보자고 생각했다.


 만약 어느 날, 다시 병이 진행되기 시작하고, 통증이 찾아오고, 의학의 손을 벗어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어 통증이 퍼지게 된다면. 현재 있는 요양병원의 분위기를 봤을 때 이런 중환자를 간병해 줄 병원은 많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때로는 병원으로부터 증상을 이유로 거절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면 내가 가야 할 곳은 호스피스 병동밖에 없을 것이고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외출을 할 수도, 사람들의 문병을 받을 수도, 방구석에서 즐거운 취미생활을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아마 그럴 것 같다. 병원의 성격대로 다가올 임종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물론 그럴지라도 내가 호락호락하게, 무의미하고 재미없게 죽지는 않겠다며 뭔가, 어떻게 하면 더 특별하게 죽음을 맞이할까 고민하며 또 똘기를 부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오지도 않을 미래를 너무 미리 걱정한다고 말했고, 나 또한 내가 그러하다는 걸 인정하고 있지만 발생 가능성이 있다면 큰 어려움일수록 미리 대비를 해야만 마음이 편하다. 생각만이라도 말이다. 사람일은 모르는 거라고 했으니.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가 생각하는 첫 번째 대비는 일단, 주변의 상황에 대해 원망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인 것 같다. 혹시 병원에서 나를 받아주지 않더라도 그들이 나를 거부하는 이유는 나를 돕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능력으로는 내 증상을 감당하지 못해서라는 걸, 고통스러워 소리를 지르면 지를수록 혼자 남게 되는 건 사람들이 나의 고통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의 고통을 보는 것이 그들도 두려워서라는 걸, 모두 하나하나 미리 이해해놓기로 했다. 그러면 적어도 그날에, 아픈 몸만큼이나 힘들 마음이 이런 류의 섭섭함으로 고통받지는 않을 것 같다.


 주변에서 이런 일을 겪고 나면 다시금 지금 현재의 순간순간이 소중해온다. 원하는 것을 모두 실현해낼 수 없다고 해도 조금 뒤척이다 이내 편하게 잠들 수 있고, 오랜 시간 다니긴 힘들어도 바깥공기를 쐬러 잠시 밖으로 걸어 나갈 자유는 얼마든지 누릴 수 있고, 사회 속으로 뛰어들지는 못하더라도 병실 구석에 혼자 앉아서 꼼지락꼼지락 글이라도 쓰고 지내는 이 순간들이 그 자체로 감사하고 또 감사해온다. 아직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참 많다고 느껴진다. 그러니 나는 왜 건강이 이 모양이냐고, 이렇게 비실비실 골골거리며 오래 살까 걱정이라고 투덜거리며 자꾸 섭섭해하는 마음도 이젠 좀 고쳐먹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럴 때일수록 '오늘'을 살겠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